끊겨진 시간의 행간 속에
삭발한 겐그리아의 침묵
당신의 제단 앞에 눈물로 내려놓고
일천 구백 구십 일년 십일월
기름 부은 순례자
하얀 종이 위에
첫 걸음, 순례의 길을 나선다
하늘 곳간 빗장 열면
예순 여섯 폭으로 펼쳐진
말씀의 비밀
겹겹이 열어 고루 풀어놓고는
이 민족을 향해
열방을 향해
가슴 가득 끌어안는 순례자여
주님 발끝에 흐르는 피 한 방울
순례자 심장 위에 떨어져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아무도 배고프지 않도록
절기마다 영혼의 만찬 베풀어
당신의 죽음으로 불 밝히는 순례자여
그대
지금 그리고 여기에
그 피로 목을 축이며
뼈 속까지 예수로 토해내
우주가 생명으로 솟아오르고
영혼의 바다가 굽이쳐
휘돌아 하늘로 올라가면
빈들이어도 좋으리
밀림이어도 좋으리
맨발이면 어떠하리
머나먼 검은 땅 끝까지 가리라
지령 구백호!
하늘의 언어로 피어나
십자가 넘어 부활에 닿는 순례자여
땀을 쥔 손
구백 번 눈물로 빨아
당신 손위에 고이 올려드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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