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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4
교회 소생과 부흥(Church Revitalization & Revival)
2018 홍해작전 말씀 요약

6.18(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 (롬 6:1-7)

사도 바울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것 때문에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라는 질문으로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앙을 지닌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재차 강조하고자 하는 목적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언제나 점검하고 또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들이 많을수록 신앙의 본질적인 내용을 숙고함으로써 문제들을 차분하게 풀어나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세례라는 의식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림을 받은 자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 인생들을 위하여 지극히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인간들 스스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아들 예수의 몸에 짊어지게 하셨고, 예수는 우리들의 모든 죄 짐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의 잔을 들이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의로운 자로 서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신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이 성도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사람들 앞에서 공포하는 것이 세례식 입니다. 세례는 출애굽의 대 역사를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세례가 가지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된 자로서 이러한 세례를 받은 자임이 분명합니까? 그런데 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4절).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더 이상 육체의 길, 사망의 길, 죄의 길, 악인이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온갖 탐심이 나를 사로잡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제는 오직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우리를 다스리고 이끄는 새 생명의 역사를 함께 이루어가시는 서울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6.19(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고후 5:14-19)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전에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말하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대 선언을 합니다.
1. 성도는 육신을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육신을 따라 안다는 것은 결국 육신을 따라서 사람을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성도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차별하는 의식을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특권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됩니다. 신분의 고하나 지식의 많고 적음에 따라 얼마든지 대우도 다르고 행동반경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모든 죄인들을 위한 것이기에 우리는 주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다’(빌 3:9)는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2. 성도는 화목케 하는 직책을 가진 자이다.
사도 바울이 화목을 강조하는 이유는 화목케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의 전부였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의 막중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할 때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 대명사는 문자적으로는 복음을 맡은 교회 지도자들을 뜻하지만 실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의미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요”(마 5:9)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는지를 안다고 한다면 우리도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사랑이 필요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는 더 이상 육체대로 알고 육체대로 판단하고 육체대로 행동하는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언제나 분열과 다툼과 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화목케 하는 사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화목하게 된 성도는 반드시 화목케 하는 직책수행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때로 무익한 자들, 무가치한 자들일지라도 우리가 다 무익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조건없이 받아주신 것처럼 우리도 저들을 조건없이 받아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라 율법준행자여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6.20(수)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의 구원이시여! (시 38:15-2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많이 받습니다(딤후 3:12). 왕으로 기름 부름을 받고 왕의 사위가 되었음에도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던 다윗처럼 시련이 많았던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처지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는 것이었고, 엄청난 업적을 남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권의 심한 견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다윗은 오른쪽을 보아도 아는 자가 없고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자가 없으므로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라나이다”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심한 멸시와 조소가 우리 영혼에 넘볼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우리를 구속하여 하나님의 아들 딸로 만들어주신 주님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는 얼마나 가리고 있습니까? 종종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찾는 자들이 놓은 올무 때문에 힘겨워하고, 거짓과 악의적인 일들로 인하여 기가 막히는 좌절과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원수 갚는 일을 직접 나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환난의 때에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5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500년 전 종교개혁의 기치만이 아니라 영원불변하는 진리입니다.
역대하 25장에 보면 유다와 아마샤가 에돔과 전쟁을 하기로 하고 자신들의 군사력만으로 모자라서 북쪽 이스라엘의 용병 십만명을 백 달란트라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고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한 사람이 나아와서 이스라엘 군사들과 함께 전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마샤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용병들을 돌려보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님께서 교훈하시고자 함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들이 반드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기도하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성도에게 필요한 덕목은 오래 참음과 기다림 입니다. 기다림은 확신이 없이는 달성할 수 없는 덕목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 살리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어 자기 백성들을 위경에서 능히 건져주십니다(시 107:20).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있는 한 여호와의 구원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6.21(목) : 고난의 이유 (시 107:10-14)

우리는 분명 빛의 자녀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어둠의 그늘에 앉아 있습니까? 왜 사망의 쇠사슬에 매여 살고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성도들이 겪은 시련과 아픔은 다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징계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우리의 마음을 낮추고 거룩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과 순종을 배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한국교회가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시편 기자가 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멸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이대로 수고와 슬픔 중에서 죽어야 하는가? 아니면 소생과 회복을 받아 사는 길을 갈 것인가? 당연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사는 길을 가야 합니다.
고난은 기도하는 것을 배우게 합니다. 고난 중에 진심어린 기도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기도와 금식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18세기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웨슬레와 심각한 신학적 갈등으로 인하여 결국은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다 잃게 되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우리가 온유하며 잠잠하도록 하자 오 우리가 다 잠잠히 기다리자 그리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되리라.’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논쟁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성장하도록 하자 이것이 그 사람들을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니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잠잠히 모든 일을 그분께 맡겨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잠잠히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도 온 땅을 두루 다니며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가 있는지 살피시고 계십니다. 그런 자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능력을 주시어 감당케 하십니다. 또한 피할 길도 내어서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합시다. 그의 구원하심을 잠잠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능히 구원의 은총을 우리 품에 안겨다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울교회 성도들은 고난을 통해서 반드시 배울 것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을 꾀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런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일으키실 것이다.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 5:8-10). 하나님의 뜻에 더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6.22(금) : 끝까지 생존하는 법 (신 4:1-4)

40년의 광야생활은 이스라엘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된 여정이었습니다. 때론 물이 없어서, 때로는 먹을 것이 없어서, 때로는 전쟁의 위험을 당하며 숱한 역경을 헤치고 요단강 목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대해서 성경은 매우 심각한 상황들이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세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최종 정리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이것은 한 마디로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광야의 인생 여정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존재합니다. 내일 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먹거리도, 마실 물도 넉넉지 못합니다. 언제 어디서 불화살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아우성입니다. 여기에서 실리를 먼저 챙기는 약삭빠른 자들이 있는가 하면 미련한 곰 마냥 우직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따라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길고 고달픈 여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대열에서 이탈했습니다. 남아 있는 자들 중에서도 갈팡질팡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이시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우리를 이 기가 막힌 수령에서 여호와께 붙어 있는 자들을 능히 건져주실 것이며, 그 즐거운 날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여호와께 붙어 있다는 것을 본문은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생존하는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그런 세상이 이미 도래하였습니다. 비록 우리가 전쟁터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굳게 붙들고, 진리의 일군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먹고자 하는 편식주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비록 그 내용이 구원의 핵심적인 요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말씀이 우리의 유익과 행복을 위해서 주신 진리의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은 일점일획이라고 가감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서울교회가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든든히 서있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기를, 주의 말씀에 붙어 떠나지 말고 주의 말씀대로 듣고 지켜 행하는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6.23(토) : 소망의 항구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라 (시 107:23-30)

본문을 기록한 시편 기자는 우리의 인생여정을 바다에서 항해하는 자들로 묘사하며 강한 바람과 폭풍우와 맞서서 씨름해야 할 것이라고 교훈합니다.
1.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본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들의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만유를 통치하시고 보존하시고 그 가운데 두신 인간의 행위를 몹시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살피시며 돌아보십니다. 거센 파도와 강한 바람을 볼 때 두려워하지 않을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풍랑도 거센 파도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다 잔잔케 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거센 풍랑, 유라굴라 광풍을 만난 듯한 고통과 죽음의 위협도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에게 고난은 비록 그것이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더욱 굳게 신뢰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사도 바울도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을 때에도 고통을 당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9). 고난은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지혜나 힘이나 능력을 신뢰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온전히 주님만 의지하게 만드는 용광로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고난을 통해서 주의 율례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철저하게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2.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우리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만 되는 것임을 절감하는 자들, 우리의 범죄함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 것인지를 아는 자들이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잔잔케 하십니다. 이 즐거움이 우리 앞에서 곧 펼쳐질 것입니다. 언제 풍랑이 거세게 몰아쳤는지 다 망각할 정로도 평온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마침내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겠다는 일편단심의 각오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악하게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이 악을 변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실 것이다. 우리들의 교만함을 꺾고 온유하신 그리스도,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정리 허숙 권사(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