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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0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2018 홍해작전


6.6(수) : 목자 같이 인도하시리라 (사 40:10-11) / 이종윤 원로목사

민수기 11장은 홍해를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과 역경 앞에서 넘어지고,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세의 인도를 따라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삶이 너무 고달프고 힘들다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원망할 처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홍해를 건너고 불과 몇 일간을 걸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불평과 원망을 토해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며 모세는 극도의 긴장감과 압박감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셨는데 그들은 영양가 있고 정력을 강하게 하는 부추와 마늘이 없다고 하며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는 관심도, 감사도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절규합니다.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목전에서 내게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민 11:11). 모세는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분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사람들의 보고로 인하여 모세의 고통은 극대화 되어 “내가 어떻게 이 백성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두 번씩이나 거듭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라”(출 3:10). 하나님이 인도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것처럼, 오늘 주님의 몸 되신 교회 또한 주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미 독수리가 제 새끼를 안고 나르듯, 내가 내 백성을 인도하리라고 하셨습니다(출 19:4). “아비가 아들을 안고 나르듯, 여호와가 너희를 안고 나르신다”고 하셨습니다(신 1:31).
흔들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인도, 보급, 구원과 업어주고, 안아주고, 붙잡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 말씀만 따라 홍해를 건너 하나님 뜻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6.7(목) : 하나님의 위로 (나 1:1-15) / 서명철 목사

하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심판하시기 전에 반드시 경고하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경고도 없이 인간을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우리들 중에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나훔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인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경고의 예언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함으로써 화를 자초합니다.
나훔서는 나훔서보다 약 100여년 전에 기록된 요나서와 함께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기록한 선지서입니다. 그러나 요나서가 하나님을 대적하였을지라도 자신의 죄를 회개한 니느웨 왕과 그 백성을 마침내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 본서는 죄악이 관영한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통해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하나님의 절대 공의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요나서와 나훔서는 그 강조점이 크게 다릅니다.
선지자 나훔의 이름의 뜻은 '위로' 혹은 ‘위로자’입니다. 나훔서가 기록될 당시 앗수르는 당대 최강대국인, 최고의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최악이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먼저 멸망시킨 앗수르 제국은 파죽지세로 남왕국 유다로 밀고 들어와서 이제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의 때에 나훔은 초강대국 앗수르의 침공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예루살렘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했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믿음의 여정을 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나훔서의 말씀이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는 이 나그네 길에서 사탄의 사주를 받은 불의한 자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크신 위로와 소망의 말씀이 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서원을 갚을지어다 인이 진멸 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나 1:15).
하나님을 우리의 산성으로 삼고 그 품안에 피난한 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위로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이니 이 복을 받고 누리시기를 소원합니다.


6.8(금) : 이스라엘의 포도나무 가지를 회복하리라 (나 2:1-13) / 서명철 목사

나훔 1장에서 선지자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예언하고 있지만, 본문 2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니느웨가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1절). “파괴하는 자”는 앗수르를 멸망시킬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을 통하여 니느웨를 심판하시는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 ‘나훔’의 이름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사람이 대단한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 힘과 지혜는 매우 제한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말을 하면서도 실제로 위험 중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섭리는 기억도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줄로 착각하다가 결국에는 절망하고 낙심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는 위기의 때에 기도할 것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자는 위기를 당하여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파괴하는 자’, 곧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을 보내어 니느웨를 치게 하셨습니까 ‘야곱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 유다 백성의 영광,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바벨론과 메대 연합군을 보내어 니느웨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막강한 바로 왕도 하나님의 홍해를 피하지 못했습니다. 무소불위의 니느웨의 앗수르 왕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13절).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의 대적이 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당한 고난은 우리의 시간으로는 길고 긴 터널과 같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시간, 카이로스로는 잠깐 지나가는 순간과 같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일점일획도 무오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오늘 하루도 간절하게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6.9(토) : 피난처 (나 3:1-19) / 서명철 목사

니느웨는 식민지 백성들의 피로 세워진 살육의 성이었습니다.
니느웨의 죄악상은 살육과 거짓과 포악과 늑탈과 마술과 음행으로 대변 됩니다. 그들은 간사한 거짓과 술책으로 다른 나라들을 속이고 평화조약도 일방적으로 어기면서 종횡무진 제국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거짓 위에 세운 제국은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앗수르는 또 다른 제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앗수르가 행한 대로 그들의 죄를 보응하시되 그들이 다른 나라에게 약탈되고 최대의 치욕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니느웨가 아무리 부유하고 강성하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의 죄악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노아몬의 멸망에 비유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8절). 하나님은 난공불락의 성 니느웨 못지않게 과거에 철옹성이었던 애굽의 수도 노아몬의 멸망을 상기시키시면서 니느웨의 파멸은 너무나 당연한 역사적 귀결임을 말씀합니다.
나훔 3장은 앗수르 왕과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성 사람들의 장례식에서 부르는 장송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장례식에는 조문객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니느웨를 위로할 자, 그들을 위해 애곡할 자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께서도 앗수르의 죽음을 위로하지 않으시고 조롱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2:4에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야유’(Holy sarcasm)라고 합니다.
나훔 2장 후반부터 3장까지 하나님의 일곱 가지 조롱, 곧 사자의 조롱, 잔인성의 조롱, 음녀의 조롱, 노아몬의 조롱, 온갖 방비에 대한 조롱, 메뚜기 조롱, 장례식 조롱 등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조롱이 나옵니다.
잠언 3:34에서는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조롱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을 하늘에서 비웃으십니다.
위기의 때에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내편이 되어 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서 하나님께 피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위로와 소망과 안식을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