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소개
서울교회 소개
서울교회의 철학
서울교회가 있기까지
주요활동
교회 오시는 길
교역자/장로
위임목사 소개
교역자 소개
장로 소개
선교사 소개
예배 안내
예배 및 집회시간 안내
교회 소식
교회행사/소식
모임/교인소식
주간기도
순례자 컬럼
언론에 비친 서울교회
Home > 교회소식 > 컬럼
2007-01-07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
그리고 그 현재적 의의(Ⅰ)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의 뜻 깊은 해인 2007년 새해가 밝았다.
장신대 김인수 교수(역사신학)의 허락을 얻어, 저자의 글「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 그리고 그 현재적 의의」를 발췌하여 3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부)


기독교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선교는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데서 맺어진 결실이다. 성령의 역사는 주로 부흥운동에서 비롯된다. 교회역사를 더듬어 보면 부흥운동에서 성령이 역사하셨고, 그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그 틀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고, 조직이 확대되었다. 이 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사역하던 남감리회소속 선교사 하디(R. A. Hardie, 1895-1949)로부터 발단되었다. 그의 통절한 참회의 사건이 차차 번지면서 급기야 4년 후인 1907년, 평양에서 모인 남자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져 한국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선교사들이 불을 붙였고,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특히 길선주 목사에 의해 승계,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Ⅱ. 대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준비과정

1. 정치∙사회적 배경
평양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즈음 우리나라의 정치∙사회적 환경은 순탄하지 않았다. 약소국 조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힘이 다스리는 냉엄한 국제 질서 가운데 비극적인 역사를 맞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사늑약, 통감부 설치, 정미7조약에 의한 경찰과 군대의 해산, 고종황제 강제 퇴위 등 일련의 일제침탈 과정을 통해 조선왕조 500년은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였다. 아울러 계속되는 흉년과 기근, 역병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황폐해갔다. 이런 육체적 탈진은 영적 고갈을 심화시켰고, 종교적 본능은 새로운 종교운동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었다. 1907년 부흥운동은 이러한 정치, 사회, 경제, 사상적 혼란에서 비롯되었다. 나라 잃고 서럽게 울고 있던 백성들에게 교회는 새로운 영적 동력으로 일어서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있었으며, 부흥운동은 다가오는 일제의 폭압에 맞설 수 있는 영적 힘을 비축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2. 교회적 배경
1) 선교사들의 성경공부
1903년 함경남도 원산 지방을 방문한 남감리회 중국선교회 소속 화이트(Mary C. White)와 캐나다 장로회 소속의 다른 여선교사 두 사람은 현지에서 선교하고 있던 캐나다 선교회 소속의 맥컬리(Louise H McCully) 선교사와 더불어 한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영성을 강화시켜 달라며 간절한 합심기도를 드렸다. 이 소식을 접한 이 지역의 선교사들은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한 주간을 특별기도주간으로 정하고 집중적인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1898년부터 이 지방에서 선교하고 있던 하디 선교사는 특별기도주간에 글을 발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준비하였는데 처음에 그는 “나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는 한국교인들이 진정한 참회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라는주제로 교안을 준비하다가, 오히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선교사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는가?”라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하디는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사죄의 확신을 얻은 후에 동료 선교사들과 한국인교인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으로 내 자신의 교만함과 신앙 없음, 그리고 이렇게 되어 버린 나의 잘못을 고백한다”라고 자백했다.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이 하디의 적나라한 죄의 고백과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체험하는 것을 목도하고 그들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어 부흥의 불길이 서서히 붙기 시작하였다. 하디의이런 참회 경험은 1907년 대부흥운동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되었다.

부흥운동이 원산을 중심으로 점점 확산되어 가던 중,이 소식을 접한 평양의 선교사들이 하디를 초청하여 1906년 8월에 장로회, 감리회 연합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어서 9월에는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원이었던 존스톤 목사가 선교사들에게 설교하면서, 한국 교인들과 지도자들에게 인도와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였다.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은 그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이듬해인 1907년 1월 2일부터 시작된 장로회 사경회를 통해 낮에는 시골에서 올라온 900 여 명의 남자들이 성경공부를 하였고, 저녁에는 여러 교회에서 온 1,500 여 명의 남자들이 모여 전도집회를 하였다.

2) 길선주 장로의 새벽기도
1907년 대부흥운동의 중심에는 길선주 장로가 있었다. 그는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또는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는 인물로 부흥운동의 중요한 준비 단계에 새벽기도 운동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는 기독교에 입문하기 전에 관성교(關聖敎)와선도(仙道)에서 행하는 새벽예불을 일상적으로 해왔는데,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그의 새벽기도는 계속되었다.1906년부터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친구인 박치록 장로와시작한 규칙적인 새벽기도에 약 300~500명이 매일 동참하게 되자, 장대현교회 시무장로이던 길선주는 당회의 허락을 받아 공식적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1906년가을의 일로, 우리나라 새벽기도회가 비롯된 시점이기도하다. 바로 이 새벽기도 모임은 대부흥운동의 밑거름과 기초가 되었고, 기도로 준비된 교인들의 마음에 성령의 불길이 닿은 것이다. 하디를 중심한 선교사들의 기도와 성경공부 모임, 그리고 길선주를 중심한 한국교회의 새벽기도와 말씀 훈련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예비되었다. 그리고 1907년 정월,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인 남자 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짐으로써 (정확히는1907년 1월 14일 - 편집자 주), 본격적인 부흥운동이 촉발하였다.

김인수 교수(장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