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의 뜻깊은 해인 2007년 새해가 밝았다.「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 그리고 그 현재적의의」를 저자인 장신대 김인수 교수(역사신학)의 허락을 얻어, 2회에 걸쳐 발췌하여 소개한다.(편집부)
Ⅲ. 부흥운동이 끼친 영향
한국의 부흥운동은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면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
1. 개인과 사회의 회개와 도덕성의 회복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는 한국 교인들에게 참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나, 부흥운동 후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되는 첫 단계로 통절한 참회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개인의 회개는 가정을 변화시켰고, 사회를 개조시키는 놀라운 변혁을 가져왔다. 이로써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속한 사회는 격랑의 물결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부흥의 물결은 다음 달 2월에 각급 학교가 개학을 하면서 여러학교로 확산되었고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도 부흥운동에 동참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 무엇보다 부흥운동을 통한 교인들의 회개 경험은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정착하는 중대한 첫 걸음을 내딛었다는 데서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지나고나서 평양은 새로운 도시가 되었다. 후에“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고, 주일에는 불신자도 가게문을 열지 못할 만큼 변모한 도시가 되었다.
2. 전도와 선교운동 및 교육기관의 확장
진정한 참회의 과정을 통과한 한국 교인들은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력투구하였는데, 이는 곧 교회성장으로 연결되어 1907년 한 해 동안 평양의 부흥운동 기간 중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의 수가 3,000명이 넘었다. 이에 따라 장로교회는 약 34%가, 감리교회는 무려 118%가 증가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부흥운동에 따른 교회 성장은 기독교 학교의 설립도 촉진하였다. 감리교회에서는 이화학당, 배재학당, 장로교에서는 경신학교, 정신학교, 숭실학교등 많은 학교가 세워진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전 해인 1906년에는 208개 학교가 있었지만 1907년에는 무려 130개 이상의 학교가 개교되었다. 이들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장차 일어날 항일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3. 인권의 신장
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진수에 접하게 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이들은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그 생활을 전환하였다. 삶의 전환의 일환으로 나타난 구체적인 현상은 전통문화의 변혁으로 이어졌다. 이는 기존의 사회신분제도가 붕괴되고, 인간 차별의 문화가 서서히 도태되어 갔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남존여비 사상이 무너지고 노비가 해방되는 일이 일어났다. 수천 년 동안 천민으로 박해받던 백정들을 동일한 인간으로 선언하였고, 갖바치와 숯장수, 광대와 무당도 더 이상 천민 취급을 받지 않고 대등한 교인으로 인정을 받게된 것도 모두 부흥운동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 나타난 두드러진 사회 현상 중 하나였다.
4. 연합운동의 활성화
한국교회는 1907년 대부흥운동을 전후하여 복음의 정신에 따라 하나 되는 일에 치중하였다. 비록 한국에서 하나의 개신교회를 세우려는 시도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성서공회, 대한성교서회 설립과, 잡지, 신문, 찬송가 발행의 합동이 이루어져 연합의 성과를 거두었다.이 연합은 또한 교육기관들의 연합으로도 이어졌다.
5. 애국운동
기독교 신앙과 애국은 깊게 연결되어 있다. 부흥운동의 기수였던 길선주의 나라사랑의 정신은 직접 독립운동에 참가함으로써 나타났는데, 그는 3.1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 33인의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명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는데, 그 중 목사가 13명이나 되었다.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슨을 격살한 장인환 의사, 매국노 이완용을 습격한 이재명 의사 등이 모두 기독교 신자였다.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 전국의 여성들이 반지를 빼어 바쳐 국채를 갚자고 하는 탈환회(脫環會) 운동,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물산장려운동 등은 3.1독립운동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나라사랑정신을 표출했던 교회와 교인들이 주도한 애국운동이었다. 이 모든 운동의 저변에는 부흥운동에서 고취된 애국사상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Ⅳ. 결론
기독교 2천 년의 역사는 선교의 역사이며, 선교에 투신한 사람들은 대개 성령의 사람들이었다. 이 성령의 사람들은 부흥운동에서 성령을 받은 이들이었고,이들을 통한 부흥운동은 교회가 성장하는 밑거름이되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부흥운동은 하디를 중심한 선교사들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이운동은 성령의 역사였다. 한국교회는 부흥운동을 통하여 형식적인 교인들이 철저한 회개를 하였고, 이 회개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까지 정화시켰다.
부흥운동을 통하여 교회와 학교가 크게 성장하였고, 전도와 선교사역이 활성화되었으며, 버림받은 사람들의 인권이 신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갈라졌던 여러 교회들이 연합하는 에큐메니즘의 정신이 실현되었으며 이 정신은 상호 이해의 틀을 마련해 주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되는 2007년 벽두에 한국교회는 교회와 민족을 위해 새로운 성령운동의 불을 다시 지필 때가 되었다.이는 교회가 새 시대에 걸맞는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이길로 들어서는 지름길은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진정한 참회를 하는 일이다. 여기에 우리의 유일한 희망과 활로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