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기념 주일을 맞아 1919년 3월 1일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16인의 기독교인 가운데 주요 지도자들을 살펴본다.
이승훈
민족대표 33인중 기독교 측 수장이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1907년평양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진흥론 연설에 감동받아 민족운동을 결심했고, 1910년 한석진 목사의설교를 듣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이어 자신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 목표를 세우고 운영했다. 일제가 총독암살음모사건인 '105인사건'을 만들어 그 주모자로 이승훈 선생을 지목하면서 이승훈 선생은 투옥을당하지만, 감옥에서 신약성경을 100번이나 읽었다.그리고 3∙1운동 직후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복역하기도 했는데, 이때도 그는 신약 40회, 구약 10회 통독을 했다. 1924년엔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던그는 1926년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해 재직하다1930년 별세하였다.
양전백
양전백 목사는 1907년 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 장로교 목사 7명 가운데 1명으로 안수를 받았다. 양 목사는 당시오산학교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민족학교였던 신성중학을 세웠고, 보성여학교와 여러 양로원∙고아원도 세웠다.1911년 일본은 일본총독암살음모사건인 '105인사건'을 조작해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체포했는데 양목사도 이때 연루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2년간 복역하였다. 석방 뒤 양 목사는 교인들에게 "수감중 고문을 이기지 못해 하지 않은 일을 하였다고 거짓말을하였으니 이제 강단에 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해 온 교회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그후 1919년 3월 1일 기독교 대표로 독립선언포고문에 서명하고 또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1933년 양전백 목사는 선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길선주
길선주 목사는 1897년 기독교교인이 되면서 세례를 받았고, 이해에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평양지부를 조직했다. 그 뒤 1907년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학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 7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평양 장대현교회를 시무했다. 길선주 목사는 남녀 구별의 불평등을 교회 안에서 타파하기 위해 남녀 좌석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포장을 철거하기도 하였다.또, 교육사업에도 참여하여 숭실학교, 숭덕학교등을 설립하였고 1912년 105인사건 때에도 수난을당하였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활동했고 그 후에는 전국을 돌며 부흥사로 성경을 가르치면서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길 목사는 평안남도 고창교회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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