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오주경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교회에서 사귀는 사람이 이 사람인가 연상작용까지 하게 되었다. 홍종만 목사의 조카는 서울대 사범대학 생물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졸업반에서 논문을 작성 중에 성동여자실업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있는 이였다.
오랫동안 이종윤은 홍순복과 유년주일학교 교사를 함께 했다. 홍순복은 5학년, 이종윤은 6학년 담임으로 이종윤은 홍순복이 교복 입은 뒷모습은 자주 보았지만 얼굴은 별로 본 기억이 없었다. 교회는 홍순복을 중등부 교사로 발령하여 당시 토요집회 때마다 이종윤의 열심있는 설교아닌 설교를 홍순복은 뒤에 앉아 열심히 받아 적는 신실한 모범교사로 기억이 날 뿐이다.
중등부 여름 수련회를 준비하던 중 이종윤이 과로로 몸살을 앓고 누웠었다. 교사회의 서기인 홍순복 선생이 이종윤 전도사 집을 방문하고 교사회의 보고를 했다. 이종윤은 잠시 밖에 나갔다 오는 동안 홍순복 선생은 책상 위에 있는 연세신학 논단을 읽고 있었다. D.D. Williams의 ‘치유와 구원’이라는 논문을 이종윤이 번역한 것이 연세 학술지에 실린 것이다. 보고를 마친 후 돌아갈 때 그 책을 마저 읽고싶다하여 빌려 주었다. 두 주 후에 빌려간 책을 돌려 받은 이종윤은 참으로 놀랐다. 그 논문의 각주에 있는 독일어 참고 문헌 중 스펠링의 오자를 빨간 볼펜으로 수정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
이종윤은 내 배우자를 택한다면 내가 택하지, 남이 정해준 사람 수준은 아니라 생각하면서 만일 결혼대상을 선택한다면 먼저 목사의 부인이 될 만한 신앙인, 학자의 부인으로 자격을 갖춘 학문을 이해하는 사람, 그리고 건강한 사람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날 이후 이종윤의 눈에 홍순복 선생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결혼은 하나님이 짝을 지어주신다 했으니 1967년 5월23일 이종윤은 홍순복과 김창인 목사 주례하에 결혼을 한다.
결혼식 전에 약혼식을 했지만 신부와 택시 타고 테이트를 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함을 메고 친구들이 신부집을 갔다 늦은 시간에 밖에서 기다리던 이종윤과 만나 돌아오는 길에 택시를 탔다.
기사가 방향이 아닌 남산으로 올라간다. “기사 아저씨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했더니 혹시 “금화에 계신 적이 있으셨나요?” 알고 보니 금화 중등학원 학생이었다. 이종윤 선생님을 찾아 그때 재배한 감자를 드리려고 택시기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안 일이지만 그 학교 졸업생 중 신학생이 둘이나 배출되었다.
이종윤은 대학원 졸업 후 다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김창인 목사의 제안으로 다시 총신대 신대원에 입학한다. 연세대 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기 때문에 총회 규정으로는 1년만 수학하면 된다. 그러나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대로 이종윤은 그의 친구 신성종과 함께 총신대1학년에 입학하여 졸업을 두 달 앞두고 유학의 길을 떠난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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