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이 지나면서 200명 성도가 넘어서자 필라델피아에서 제일 큰 교회로 급성장한다. 성도들은 첫 사랑의 뜨거움을 갖고 새벽기도회, 주일찬양예배, 금요모임, 수요집회까지 열심을 다해 섬겼다. 세례받는 자의 수가 늘어가고 필라델피아에 영적 새바람을 일으켰다. 로간 한인촌은 마침내 필라델피아 한인회를 탄생시켰고 필라델피아 제일장로교회는 필라 한인 목사연합회를 출범시킨다.
이종윤의 모친 박귀순 권찰은 이종윤이 박사학위 논문 통과 소식을 듣고 그동안의 수고의 열매를 보는 듯 기뻐했다. 뉴욕에 있는 한인문화원 주최 장한 어머니에 추천되어 수상하시고 감사했다. 제일장로교회 설립 공로자로도 존경을 받았다. 교회 설립 전단을 아이들과 손잡고 다니시면서 super market이나 거리에서 전도지와 전단을 뿌리며 교회가 설립되니 오셔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복받으시라고 하시며 해가 진 밤에까지 전도지를 살포했다. 이종윤의 학위논문은 Internal Examiner(교내시험관) 3명과 External Examiner(교외시험관) 1명 전원이 A를 줄 경우 Oral Examine(구두시험)이 면제되는 학사 규정에 따라 특별 구두 시험없이 통과되었다. M. Black교수가 세계신약학회(SNTS)회장을 역임했고 Monography단행본 Editor로 출판을 권하되 논문 분량이 너무 커서 학위논문 출판을 위해 500page정도로 줄이면 좋겠다고 했다. 영국에서의 학위 수여식에 참여키 위해 온가족이 함께 가기로 하였으나 어머니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자녀들(두딸과 한아들) 집에 방문하고 한국에 가고 싶다 하셔서 원하시는대로 보내드렸으나 학위를 받고 돌아와 보니 캘리포니아에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다고 한다. 급히 동부로 모셔오게 했다. 이종윤의 아내 홍순복이 실험실에서 Superviser로 일하는 하네만 병원에 입원시켜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주일찬양예배 직전에 이종윤은 병원을 찾아가 어머니를 문병할 때 아무래도 숨소리가 가빠지는 것을 알고 두 손을 붙잡고 문병 온 성도들과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천국소망을 갖게 하는 임종기도를 드릴 때 들릴 듯 말듯 어머니는 아멘으로 응답하시고 마지막 아멘으로 기도를 그칠 때 숨을 내쉬면서 저 천국으로 고요히 평안한 모습으로 가셨다. 필라델피아 모든 교회 목사들이 관을 들고 복된 죽음을 죽으신 어머니를 Rose Hill Cemetary에 묻고 장한 어머니 상패와 사진이 찍힌 비석을 세워 드리고 필라델피아를 방문할 때마다 비석을 쓰다듬으면서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아버지는 충남 아산군 음봉면 쌍룡리 선영에 묻혀있다. 1996년 10월 5일이 충청남도가 개도한지 100주년이다. 그때 100주년을 기해 자랑스런 충남인 100인중에 이종윤이 선정되어 작은 상패를 받았다. 이제 이종윤의 고향은 아버지가 묻혀있는 충청도와 어머니가 계신 펜실바니아 필라델피아다.
학위를 받은 이종윤은 그의 별명대로 박사가 되었으나 아직 목사가 되지 못했다. 제일장로교회를 섬기려니 목사안수가 급하게 되었다. 세례식, 성찬식, 결혼식, 장례식 모두가 목사의 몫이지 박사로는 안된다. 미주 한인총회들이 교단마다 생겨나고 있는 때라 제가끔 이종윤 영입작전이 벌어졌다. 이종윤은 로마에서는 로마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한인총회보다는 개혁주의 신학 입장에 선 RPCES(Reformed Presbyterian Church, Evangelical Synod) 필라노회에 목사 안수청원서를 냈다. 목사고시가 엄격했다. 필기시험 중 히브리어는 신학교 성적이 A를 받은 자는 시험면제 받는 제도에 따라 면제 받았으나 헬라어와 다른과목들 그리고 노회원 전체 앞에서 면접이 까다로웠다.
고시위원 중 헬라어 시험관은 이종윤의 신학교 동기생이었다. 자네가 신약박사인데 그러나 시험은 시험이라고 했다. 전체 노회원 앞에선 이종윤은 의외의 질문에 당황했다. 어느 분이 질문하기를 건전한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 받기를 원한다. 헌데 그는 적당히 음주를 한다. 네가 목사가 되었을 경우 그에게 세례를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이종윤은 쉽게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즉시 성경적 근거를 대라 한다. 논쟁 아닌 논쟁이 붙었다. 노회장은 밖에 나가서 기다리라 한다. 한동안 논쟁후 다시 들어오라 하더니 같은 질문을 해서 똑같이 대답하면서 한국교회가 술, 담배, 놀음, 축첩을 금한 것은 사회가 그것들 때문에 피폐해지고 복음전도에 해롭기 때문이었음을 상기 시키고 나는 한국유학생으로 필요에 따라 미국에서 안수를 받기를 원하나 나의 일터는 한국이다. 여기서 yes하고 저기서 no라 할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다시 나가 있으라하여 다시 얼마 후 들어오라 한다. 이번엔 노회장이 E. J. Young박사의 아들되는 젊은 Young박사가 쓴 Separated Life라는 책을 주면서 이 책을 읽고 그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성경과 배치되는 것인지 일치한 것인지를 일주일내에 노회장에게 보고하라는 것이다. 이종윤은 150page되는 작은 책을 그날밤 10시가 되기 전 읽고 즉시 노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회원권과 성경과 일치된 입장이라는 대답을 했다. 노회장은 더 이상 다른 말 하지 말라 하고 안수 받게 된다고 통보해 준다.
이종윤은 박사학위는 대학의 총장이 주지만 목사는 사도권의 전승인고로 아무에게나 안수 받을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노회장을 찾아가 RPCES필라델피아 노회가 안수식을 주관하되 내가 원하는 분들로 하여금 안수위원으로 청빙하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 했다. 노회장은 웨스트민스터 10년 선배로서 그렇게 하라 하신다. 이종윤은 1976년 11월28일 추수감사주일에 Holy Trinity Bethlehem Presbyterian Church(UPUSA)에서 박윤선목사가 설교를, 기도를 이상근목사가, 축도를 이인제 목사께 맡기고 목사안수를 받고 돌아서서 제일교회 지창욱집사를 장로로 안수하고 목사안수 후 첫 축도를 했다. 안수받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종윤목사 이리 좀 앉게, 나는 목사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네. 모든 면에서 반듯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조금 교만하게 보이는 것이 흠일세.” 어머니의 조심스런 그리고 진정 사랑하는 아들 목사에게 주시는 첫 번 그리고 마지막 훈계였다. 이종윤은 그때부터 겸손 겸손 그리고 또 겸손을 외치면서 일생을 살기로 했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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