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병원, 교회 등지에서 청소하고 공장에서 조립하는 노동, 결혼식같은 파티에 웨이터로, 순찰자, 순찰병으로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갖은 일을 다했다. 세상에 더러운 것은 청소하는 영적 사역자를 만드시려고 보이는 것부터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일을 하니 어려움없이 해냈다. 성적도 낙제과목은 없었으니 감지덕지다.
웨스트민스터를 졸업하고 예일대학 신학부 신학석사(S.T.M)과정에 입학지원을 하여 인터뷰를 하기 위해 콘넥트 커트 주를 갔다. 모든 것이 만족하다. WCC장학금 신청을 해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외엔 다른 질문이 없었다. WCC장학생이 되려면 한국에서 NCC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종윤이 섬기던 충현교회는 NCC회원교회가 아니다. NCC추천을 받을 수 없다고 하니 올해 학교 장학금은 이미 다 확정되었다고 내년에 오면 고려하겠다고 한다.
이종윤은 웨스트민스터에서 Th.M(신학석사)과정을 하기로 하고 공부를 계속했다. 대학원을 거의 마칠 무렵 필라델피아의 템플대학교 종교학과 박사 학위 과정에 입학을 하고 한 학기 이수하였으나 신약교수는 카톨릭 신자 한 분뿐인데 박사 입학생은 전체 50명정도였다. 이종윤은 이를 포기했다. 그해 성탄절에 이종윤이 교육전도사로 섬기는 Holy Trinity Bethlehem Presbyterian Church 담임목사인 Edward Jones목사님을 집으로 초대했다. 식사초대에 응한 Jones목사는 50세쯤 되신 총각목사였다. 그가 이종윤의 집에 들어오자 깜짝 놀랄 만큼 “아, 세인트 앤드류스!”창가에 꽂힌 크리스마스 카드를 집어 들며 어떻게 이 카드를 갖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연세대 김찬국교수가 St. Andrews대학에 연구차 가셔서 보내준 카드였다. 죤스목사님은 그 대학이 자기 모교이며 그 학교 신약학부에 Matthew Black, Mc Wilson, Earnest Best박사같은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교수로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죤스박사님은 자기집으로 곧 가서 카탈로그를 가져다 보여 주면서 스코틀랜드 Oldest University며 종교개혁의 발상지로 죤 낙스의 모교이기도 한 St. Andrews를 한껏 자랑한다. 이종윤이 이미 읽은 바 있는 저명한 교수들이 있는 그 대학에서 학위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날 밤 늦게까지 세인트 앤드류스의 역사와 거기서 자기가 학위공부 했을 때 얘기로 시간을 보내고 네가 원하면 자기가 동문으로서 추천을 하겠다고 한다.
이종윤은 다음날 즉시 웨스트민스터 지도교수인 스킬톤박사를 찾아가 의논을 드리고 Hughs박사와도 의논했다. 그들 모두는 St. Andrews를 적극 추천한다. 다만 예수의 모어(母語)가 아람어라는 주장을 하는 Matthew Black교수에게 가는 것이 조금 걱정이 된다는 Skilton박사의 말씀이 있었으나 그 부분을 연구하려는 것이 아니니 추천을 해 달라고 했다. 세인트 앤드류스에 편지를 보냈더니 이미 입학원서 마감은 12월로 했으나 지금이라도 연구할 제목과 50페이지 이상의 개요를 보내주면 사정을 고려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다른 요구조건은 다 준비되었지만 논문 개요를 만들기엔 역부족이었다. 하는 수없이 웨스트민스터 석사 논문 준비하던 것을 만들어 보냈다. 세인트 앤드류스대학에서는 교수 한 분이 박사 후보생 5명이상 받지 않는 전통이 있다. 그해 마침 한 학생이 학위를 받게 되어 이종윤은 늦둥이 입학허가를 받았다.
이종윤의 아내 홍순복은 2년반만에 Medical Technologist과정을 마치고 ASCP(America Society of Clinical Pathology: 임상병리학 기사)자격증을 획득했다. 대형병원마다 그를 필요로 하여 주일성수 할 수 있고 박사공부까지 장학금도 주고 일할 수 있는 필라델피아 시청 앞에 위치한 Hahnemann Medical Hospital(대학병원)을 선택하여 취직을 한다. 당시 몇 명 안되는 한국인 의사들이 8,000$에서 10,000$을 받는데 홍순복은 15,000$의 수입을 얻게 되니 이종윤은 그때부터 경제문제에선 자유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너무나 정확하다. 웨스트민스터 졸업식에 참여하러 오신 이종윤의 모친이 미국서 출산한 두 딸(미영, 미경)과 한국서 낳은 맏딸(미리)을 돌보시고 홍순복은 이종윤의 후원자가 된다. 이종윤은 가족들을 미국에 남겨두고 다시 대서양을 넘어 유럽으로 유학의 길을 떠난다.
입학지원이 늦었고 기숙사도 배정이 끝난지라 이종윤은 대학에서 소개해 준 GreyHouse 개인집 이층에서 인도에서 온 Aftaraj와 함께 자취를 하게 된다. 아침은 간단히 토스트 한쪽으로 때우고 점심은 19페니짜리 fish & chips를 의자도 없는 간이식당에서 서서 한 조각 먹고 저녁은 아프다라츠와 교대로 준비키로 했다. 이종윤식(?) 스키야끼를 만들어 인도친구에게 대접하면 평생 처음 먹는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고 지금도 편지를 하면 그 얘기부터 회상한다.
세인트 앤드류스는 골프를 치는 이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골프의 성지로 지금도 British Open과 같은 큰 경기가 계속되고 거기서 골프를 친 것을 영광으로 안다. 그 대학은 전통적으로 매주 수요일은 수업이 없다. 강의 시간에 학생이 질문을 하지 않고 교수 연구실 앞에 붙어 있는 예약서에 수요일 시간에 맞는 질문 예약을 한다. 대개 오후엔 교수도 학생도 골프장에 간다.
그러나 이종윤은 그 좋은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골프채를 한번도 잡아 본 적이 없었다. 가족을 떼어 놓고 온 목적이 골프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책상 앞에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6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써 붙여놓고 조찬을 7시에 먹고는 오전8시부터 밤10시까지 도서관과 강의실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리고 점심과 저녁먹는 대부분의 시간을 놓쳐 2년차부터 대학원생 기숙사인 Deans court의 식사를 하지 못하고 늦은 시간에 fish & chips 먹는 것으로 허기진 배를 채운다.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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