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운항하던 PAN AM기가 한국유학생 운송을 위해 김포공항에 특별 출항을 해서 한국유학생 100여명이 함께 떠나는 역사적 순간이 왔다. 공항은 가족들과 친지들의 환송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여기저기서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 유학길은 자유롭지 못할 뿐아니라 한 번 가면 영원히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가는 사람처럼 기쁨의 눈물보다는 이별의 슬픔이 더 컸다.
이종윤은 충현교회 10년사 집필을 하면서 유학수속을 밟던 중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접한다.
국방부에서 신원조회 과정 중 병역미필이라는 사유로 해외여행 불가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공문서를 받는다. 그는 예배당에 엎드려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김창인목사께서 수속 잘 되어 가느냐고 물으셔서 간단하게 잘 안풀립니다 했더니 기도하고 다시 한번 가보라고 하셨다. 이종윤은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병무청을 찾아갔다. 창구에 앉아 있는 이가 사유를 듣더니 손가락 셋을 펴면서 3장을 가져오면 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제대증을 보여 주어도 대답없이 손가락만 펴보인다. 하는 수 없이 돌아오는 중에 복도에서 지나가던 어떤 분이 “혹시 3사단에서 근무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럼 이종윤목사님” 하자마자 “제가 이종윤입니다. 저를 아십니까?” “반갑습니다.” “헌데 누구신가요?” “나는 병무청에 근무하는 사람인데 목사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요.” 결국 하나님은 돕는 천사를 보내주신 것이다. 이종윤의 방문 목적을 들은 그가 이종윤에게 앞에 있는 다방에 가서 잠시 기다리라 하고 제대증과 국방부에서 발송된 해외여행 불가 통지문을 갖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종윤은 무슨 일이 생길지 짐작도 못한 채 평생 처음으로 다방이라는 곳에 들어가 앉아서 얼마동안 기다렸다.
그 분은 3사단 18연대 3대대에서 근무할 때 훈련과 작업에 지쳐 쓰려져 기진맥진 했을 때 인격지도를 하는 강의시간에 피곤한 분은 눈을 감아도 좋으나 귀만 열고 있으라고 해서 그 때 꿀잠을 자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인격지도 교육시간이 제 군대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면서 “실은 목사님 건은 내가 담당 과장입니다. 제대 후 2번 재훈련이 있는데 1번밖에 받지 않으셨더군요.” 그때야 이종윤은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동대문구 창신동에 살다가 서대문구 갈현동으로 신혼살림 위해 어머니의 남은 재산으로 집을 사서 이사를 했는데 친구들은 예비군 훈련을 가는데 예비군 훈련 통지문이 나오질 않아서 갈현동 동회에 가서 문의했더니 전 주소로 가보라 하여 창신동 동회를 찾아갔으나 “별사람 다보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통지문 받고도 뺑소니치는데 통지문 찾으러 다니는 사람 처음 보았다”면서 핀잔만 받았던 일이 상기 되었다. 과장님은 이종윤에게 “걱정 마십시오. 내가 여기 도장 찍어왔습니다. 이것 갖고 유학수속 밟으시고 부디 성공하고 돌아오시어 우리 국민에게 인격지도 교육 많이 시켜주십시오” 했다.
이종윤은 갈현동 집에서 1968년 5월16일 첫아이 미리를 낳고 그해 8월19일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하나님의 종이 되려는 청운의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 유학의 길을 떠난다. 신학교의 B.D.(지금의 M.Div.)과정은 정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어야 졸업할 수 있는 과정이다. 미국학생들도 3년에 졸업하는 학생이 많지 않다. 한국의 어느 학생은 7년간 공부를 하고 졸업을 간신히 했다. 과목당 읽어야 할 분량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양을 교수마다 요구하고 term paper를 몇 개씩 그리고 헬라어, 히브리어 단어 퀴즈시험이 매일같이 있으니 밥먹을 시간도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껴서 사용해야 했다. 이종윤은 3년만에 졸업을 했다. 물론 간신히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처럼 공부를 계속하면 수명이 몇 년 단축될 것 같이 여겨진다.
어느 주일에 이종윤은 미국교회에서 설교(간증)하도록 초청을 받았다. 토요일 밤 자정까지 공부를 하고 성주주일 신앙이 투철한 이종윤은 밤12시 땡소리부터는 책을 덮고 성경을 펴서 설교를 준비했다. 결국 주일아침 일어나서 세면장에서 졸도 한다. 앰브란스에 실려 응급실로 가서 응급조치를 받고 그 일이 학교에 알려지자 이군이 음식이 맞지 않아 영양실조로 졸도를 했으니 그의 아내가 미국에 올 수 있도록 기도를 하라는 교장의 방 게시판에 붙기도 했다. 영양실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양식을 못먹어서가 아니고 먹을 것이 없어 못 먹어서였다. 당시 월70불의 장학금을 받는데 그것도 지출내역을 학교에 보고해야 한다. 비싼 쇠고기보다는 값이 싼 닭고기를 먹으라는 조언을 받았을 때엔 가난한 나라의 백성된 서러움을 느끼며 그래도 주님 때문에 고생을 하자고 이를 악물었다.
홍순복에게 Chestnut College의 1-20form을 보내주고 미국에 올 수 있도록 수속을 요구했다. 그녀의 조부께서 1900년대 도미하시어 유학생의 고통을 체험하신터라 유학생 아내로 자기 손녀를 미국에 보낼수 없다하여 이종윤은 처음부터 엄두를 못내었으나 이미 학교에서 기도를 시작했고 또 유학생활도 1년반을 지내고 보니 조금 자신감도 생겨서 가족비자보다는 학생으로 미국에 올 것을 요청했다. 홍순복은 문교부 유학생 시험 원서 마감날에 헐레벌떡 다니면서 모든 서류를 제출했다. 영어, 역사, 상식 세 과목에 준비없이 치룬 시험이라 기대를 안했으나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셔서 합격하고 그때 한미재단 시험까지 통과되어 학생비자로 갖난아이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남편을 돕겠다고 미국으로 온다.
이종윤은 유학온지 1년이 지나면서부터 귀도 눈도 열린 것을 느꼈다. 이젠 무언가 할 만하다는 자신감도 붙었다. 한국에서 신학이라고 조금 한 뺨 정도의 맛이라도 보고 온 것이 그의 공부의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종윤은 아내와 함께 작전을 짰다. 당시 이민국에서 학생비자를 가진 학생이 B학점 이상의 성적을 올릴 경우 Work permission 노동허가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는 노동허가를 받아 주20시간 하루 4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고 홍순복을 학교에 보냈다.
(다음 호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