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에서 동성애에 대한 문제가 주요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적인 것으로 판결하면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21개국이 동성애를 지지하고 있어 한국 사회도 술렁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성결혼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반(反)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동성애를 지지 내지 주장하는 목회자 Matthew Vines와 Wilson Ken의 입장을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비판하고,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를 바르게 계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그들은 죄에 대한 탈(脫)성경적 이해를 한다.
Vines와 Ken은 동성애와 연관된 이들이 저주를 받았다는 성경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성애자들과 개인적 친분을 쌓으면서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동성애자들의 지혜롭고 사랑스런 동성자와 애정을 느끼는 것이 타고난 본성에서 오는 것임으로 이를 죄로 규정하는 것은 오히려 성경을 잘못 읽은 결과라 한다. 전통적인 신앙인은 창조주 하나님 뜻에 반(反)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것을 죄로 이해한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은 삶의 동기와 방법 그리고 목표가 에로스 사랑에 있다는 상황윤리(Situation ethics)학자들의 사상을 좇는다. 하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것이 동성이 되었다고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성경은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거나 금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남색 하는 것, 매춘, 강간과 같이 사랑 없이 상대방을 남용하는 것을 금한 것이라 한다.
Vines와 Ken은 역사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를 거부하는 것은 역사 발전을 중단시키는 어리석은 짓이라 주장한다. 특히 Ken은 크리스천들이 노예제도에 대해 잘못된 행동을 한 것처럼 지금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Vines역시 성경이 노예들의 인권을 주장하고 있으나 기독교회가 노예를 차별대우 했듯이 오늘날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교회는 역사 발전에 따라 재해석되고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는 성경은 항상 세상 문화나 역사에 반대의 길을 제시하지 세속사의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다.
아주 최근까지 기독교의 모든 교회와 신학자들은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저주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힘차게 외쳤다. 동성애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노예를 차별하듯 현대교회가 동성애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뜻에 반(反)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동성애는 죄가 되므로 교회는 그런 길로 빠지지 말 것을 간곡히 호소하는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를 지지하는 성경을 누가 찾았다면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광경을 보고 성경의 증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허구일 뿐이다.
그들은 사회에서 자기 존재감이 없는 상태에서 종교적 신앙보다 경험적 증거를 찾으면서 일관성도 없고 자기 동일성도 상실한 채 이성적 판단 없이 자유나 평등 문제를 성경에서 찾으려 애를 쓰나 성경 아닌 타락한 문화를 성경으로 잘못 읽고 있다.
그들은 성경 권위를 인정하나 반(反)성경적 해석을 한다.
Vines와 Ken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나 동성애가 잘못된 것이라 가르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레위기 18:22에서 동성애에 대한 말씀 중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면서 금하고 있으나, 레위기 11:9-12에서도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조개류와 갑각류(굴, 새우, 게 등)의 물고기를 “가증한 것이니 먹지 말고 혐오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대조시키면서 동성애를 반(反)성경적으로 합법화시키려 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현대 크리스천들 중에 조개류나 갑각류의 물고기를 먹는 것이 죄를 짓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듯이,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입장도 바뀌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구약 전체를 보는 눈이 없거나 착시현상을 일으킨 것이 아닌 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사도들의 예루살렘회의 결정을 무시한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먼저 유대인의 규례를 지켜야 기독교인이 되느냐는 문제를 놓고 기도와 토론을 하는 초대교회 총회가 모였다. 사도들은 모세의 희생제도와 예전의 성결법을 더 이상 이방 신자들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다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 교회의 이신칭의(以信稱義)교리”를 확증한 바가 있다. 다만 이방인들이 자기들 신전에서 우상에게 제사하던 ‘우상의 제물’과 이방 신전에서 행해지는 ‘음행’과 짐승의 목을 매어 죽여 바친 ‘목매여 죽인 것’과 이방 신전에서 제사장이 맛보거나 마시는 ‘피를 먹지 말라’는 최소한의 법을 부과함으로 의식법과 도덕법을 구별한 것을 동성애자들은 알지 못했거나 거부한 반(反)성경적 해석을 한 것이다.
레위기 19:18의 황금률은 아직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예수께서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도리어 완전케 하러 오셨다"(마 5:17)고 하셨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을 자기 합리화의 방편으로 오용해서는 안된다. 동성애를 금한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다.(롬 1장, 고전 6장, 딤전 1장등) 그러나 마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장로의 전통으로 부정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성결법과 짐승을 죽여 피를 바치는 제사법이 더 이상 효과가 없음을 가르치셨다. 이같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온 성결법과 제사법의 폐기가 동성애를 금한 율법의 폐기로 해석하는 반(反)성경적 해석의 오류를 그들은 범한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적 비전이 결여된 반(反)사회적이다.
성(性)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Vines와 Ken은 잘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세워 주신 가정에 대한 말씀과는 상당한 거리에 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창조시 서로 다른 짝을 지으셨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 남자와 여자, 심지어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것을 말씀한다. 이것이 창조의 지혜요 영광이다. 그들의 상호관계를 통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연합하고 함께 하게 하셨다.
남자와 여자는 독특한(Unique)존재로서 서로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극상품 피조물이다. 그들은 서로 부족을 채워주고 상대편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므로 완전에 이른다. 성(性)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으로 평생 결혼 언약 속에서 힘과 영광을 함께 한다. 결혼은 인간 삶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 유일한 자리는 아니지만 매우 설득력 있는 처소다. 남자와 여자를 새롭게 만들고(reshape), 서로 배우고(learn from), 더불어 일하게 한다(work together). 최근 사람들은 문화의 다양성을 즐기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양성 속에서 연합이라는 끝을 자른다. 이성(異性)의 결혼을 파괴시키고 동성애를 주장하려 한다. 다양성 속에서 연합이라는 비전 없이, 성경에서 주어진 성(性)적 금기 사항은 의미가 없다. 동성애는 다양성의 명예도 아니고 성교(性交)에서 인간의 성(性)을 구분할 필요도 없게 한다. 동성 관계는 완전케 하는 배우자가 되려는 노력도, 이성의 부부로부터 나오는 자녀에게 무엇을 준비할 필요도 없게 하는 반(反)사회적인 악마의 유혹이다.
필자는 동성애를 주장한 이들에게 노하거나 저주스런 마음으로 그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주된 주장들이 脫성경적이고, 非성경적이며, 反성경적 그릇된 주장임을 지적한 것이다. 특히 인류를 멸망의 길로 끌고 가는 反사회적 동성애 지지자들은 이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더 이상 건강한 사람을 미혹하는 일을 하지 않기를 기도한다.
(위 글은 한국장로신문 7월 11일자‘순례자’란에 실린 것을 지면상 요약 정리한 것이다.)
(정리 허숙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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