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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26:1-12
시편 26편은 자연법상으로나 실정법상으로나 죄가 없는 사람이 악인의 취급을 받아 하나님께 탄원하는 시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바른 생활을 근거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기도는 바른 생활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1. 의인의 길
“내가 진리 중에 행하여”(3절).
이 말씀은 시인의 과거 삶이 성실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무흠한 사람임을 주장할 사람은 땅 위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리 중에 행했다고 하는 시인은 자기가 진리의 걸음을 걷는 중에 적당히 눈가림만 하지 않고 성심을 다해 진리의 걸음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흔들리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흔들리지 않았다는 말은 변절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만을 의지한 것을 의미합니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 아니하리이다”(4절).
허망하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큰 가치를 부여하고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허망한 것은 영원한 것이 못됩니다.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사람만이 날마다 새 힘을 얻고, 새 걸음을 걷게 됩니다. 간사한 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곧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허망한 자와 간사한 자에게는 진실성이 없습니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5절).
행악자는 오직 악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자신은 하루에 세 번 싸움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고 술회합니다. 악한 자는 의지가 약해서 악에 쉽게 끌려갑니다. 시인은 그들의 행동을 미워하며 결코 그들에게 동조하지 아니하고 진리의 걸음을 걷는데 충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무죄를 스스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판단을 맡겼습니다(1절). 이 시에서 시인은 자신의 깨끗함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사는 동안 진리의 걸음을 힘써 걸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흠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명해주실 것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3절).
시인은 자기가 진리의 걸음을 걸은 것이 자기의 의지력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자기가 진리 중에 행한 것에 대하여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자기 영광을 구하며 산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거니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이 끝까지 참으시며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 현재적 서원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1절).
이 말씀은 단순한 간구가 아니라 신앙고백입니다. 주기도문을 연구해보면 거기에 청원사항이 적어도 6가지가 나오는데 후반부에 나오는 3 가지‘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내 죄를 용서해 주시옵고’,‘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청원이면서 동시에 서원입니다. 이것은 기도이면서 신앙고백입니다. 땅 위에서 양식을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죄를 용서해 주실 분도 하나님뿐이시며 악에서 구하실 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야 생명도 부지할 수 있고 인생을 살아갈 수 있고 산업도 지탱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사오니 지금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현재적 서원을 합니다.
억울함을 당한 시인은 하나님의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허망한 사람, 간사한 자, 행악자의 특징은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람은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은 물론 인간의 법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순결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6절).
구약 시대에는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물두멍에서 손을 닦습니다. 시인은 개인의 순결을 말하며 손을 씻고 제단에서 마음껏 예배를 한다고 합니다.
“감사의 소리를 들려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7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른 것은 이방의 빛을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증거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전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찾는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나 깨나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전도를 하지 않고는 사는 의미도 목적도 없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사람은 살아있으나 죽은 신자와 같고 열매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8절).
시인은 주께서 계신 집, 곧 교회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반적인 악인들처럼 곤고한 자리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면서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외적으로 성실하게 일하고 내적으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2절).
평탄한 데는 안전한 곳, 무리는 교회를 말합니다. 시인은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실 것으로 확신하고 천천만만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비탄에 처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에 가서는 소망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탄한 곳에 서서 주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부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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