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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22:22-31
니라 십자가에서 대못에 찔려 죽게 되시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는 어떤 면에서 사형 집행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실 다윗 시대에는 십자가 형틀이 없었으나 시인은 고난의 주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미리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로의 부활을 말했다”(행 2:30).
1. 어둠의 시간을 통해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종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은 다윗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이 이미 본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빌라도에게 끌려가셨습니다. 사실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에 재판을 연기시키려고 했지만 자기의 안전을 위해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했습니다. 이때 빌라도가 생각한 것은 오직 자기의 목숨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한 말씀도 하지 않고 오히려 울고 있는 여인들을 보시며“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해 울라”(눅 23:28-31)고 하시며 다가올 무서운 날들을 예언하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두 손과 두 발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도 예수님은“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저들이 알지 못하나이다”(눅 23:4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여전히 자기가 아닌 백성들의 죄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용서를 비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생명만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은 그날 정오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날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땅은 온통 어둠으로 뒤덮였습니다. 아마도 이 어둠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지시고 죽어가는 아들 예수님을 보지 않으시기 위함일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3시간 동안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①“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1절). 예수님은 갑자기 소리를 치십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②“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1절). 대속의 사역은 예수님 홀로 하셔야만 했기에 예수님을 도울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③“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절). 인간 때문에 버림 받으며 기도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실 리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외침은 이미 수 천 년 전에 예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는 동안 구약성경을 묵상하셨고 다른 이들의 생명과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둠이 걷히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예수님은“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시편 22편의 성취로 십자가를 바라보셨습니다.
시편 22편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지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십자가를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생명은 시의 마지막 절을 인용하므로 끝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절망 중에 죽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속죄 사역은 그의 고난을 통해 완성되었고 부활하셨으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승리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2. 고난 받은 구원주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고 낙담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버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버림을 받은 시간은 바로 우리가 버림을 받은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대속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내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한 조상들을 건지신 하나님께서 그들은 구원하시고 왜 나는 버리시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아는 예수님은 자기에게도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조롱감이 되었습니다. 배고픈 것, 힘든 것은 참아도 멸시를 당하는 것을 참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받아야 할 조롱과 멸시를 감당하시며 벌레취급을 받는 비통한 자리에까지 떨어지셨습니다.
“오직 주께서 나의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9절).
예수님은 낙망하지 아니하시고 다시금 기도 하십니다. 신앙은 의지하고 맡기는 것, 곧 헌신 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드렸습니다. 헌신이 없는 신앙은 아직 확실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승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 고통도 당하셨습니다(12-18절). 십자가는 유대인의 형틀이 아니고 로마인의 것으로 시편에 언급된 것은 모두 그대로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고난의 종 예수님은 하나님과 대화를 회복합니다(19-21절). 히브리 원문에는 19절의‘여호와’앞에 당신(아타)라는 말이 있어‘여호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역설체는 시인이 원수에게서 여호와께서 시선을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나의 힘이시여’라고 하며 힘의 본질 인 하나님을 부르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어둠의 시간은 자나갔고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주시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의 효험의 범위는 너무 크고 넓고 높고 깊어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선지자들의 예언 역시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멸망 받는 것은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있습니까? 이 진리를 믿고 영생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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