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무덤이 열린 것처럼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가 되기 쉽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은 열린 무덤 앞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도 그가 주님이신 줄을 몰랐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으며 먼 길을 가면서도 그가 부활하신 주님이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이 먼저 열려야 한다. 그래야만 진리 되신 주님을 알아 볼 수 있고 부활하신 만왕의 왕께 경배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면서도 오히려 의심했던 것은 아직 저들의 영안이 열려 있지 않았던 까닭이다. 바울도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지고 그의 눈이 열린 다음에야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가 곧 자기가 기다리던 메시야임을 발견했던 것이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들의 눈이 열려져야 한다.
한국교회가 받은 복과 은혜가 많아 크게 부흥했고 많은 일들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눈을 뜨고 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 면도 적지 않게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것을 교회정치 제도를 고침으로 해결해 보려는 노력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보다 교회 본질을 상실한 채 겉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되었다면 어디에 무슨 병이 들었는지를 바로 진단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주님의 무덤이 열린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옛날 제자들처럼 신앙지진아가 되기 쉽다. 주님의 무덤 속을 걱정스런 눈으로 들여다 보는 여인들에게 천사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했다.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하셨다.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자기들의 경험과 얕은 상식을 앞세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순간 제자들의 믿음과 소망은 죽었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인데 위기의 순간에 이것들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도 위기가 오면 당황하고 절망과 두려움에 떨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정적인 것은 쉽게 믿는다.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예수 부활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조차 의심없이 믿는다. 제자들도 그래서 각기 흩어졌다.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들은 믿지를 못했다. 도마도 의심한 것은 과학정신이 많아서가 아니라 마음문을 열지 못해 믿음이 죽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마음이 열리지 않고는 숨겨져 있는 말씀의 비밀을 깨닫고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제자들은 믿음과 동시에 소망도 죽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알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하면서 원망과 탄식의 소리를 퍼부었다. 그들이 바란 분은 생명을 구원할 자가 아닌 이스라엘을 구원할 정치 지도자 정도를 기대했는데 그 희망이 십자가 앞에서 산산조각이 났다는 것이다. 믿음 소망이 다 죽었으나 그들에게 사랑이 불씨같이 남아 그들을 그 무서운 밤에 무덤에로 달려가게 했다. 사랑이, 죽은 믿음과 소망을 살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흩어졌던 이들이 다시 모이게 되었다. 주님의 무덤이 열린 것처럼 우리의 입이 열려야 한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무덤이 열린 것처럼 이제 우리의 눈과 마음과 입이 열려야 한다.
형제여, 그대는 어찌하여 열린 무덤 앞에서 짐짓 눈을 감고 주님을 보지 않고 현실만 개탄하고 남을 비난만 하고 있는가. 마음을 닫고 자기 의만 주장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을 사랑하므로 죽었던 믿음, 소망을 소생시키고 내가 주를 보았노라고 외친 막달라 마리아처럼 외쳐 보자.

이종윤 목사
<한국기독교학술원장ㆍ서울장신대석좌교수ㆍ서울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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