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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3
105인 사건과 기독교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강제병합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헌병이 경찰업무를 장악하는 헌병경찰제를 실시하였다. 막대한 권력이 주어진 초대 헌병사령관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였다. 그는 1900년대 초반 러시아 주재공사관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제정 러시아의 비밀경찰제도를 눈여겨보았다가 이를 헌병경찰제에 활용하였다. 그리고 정보 조작과 고문으로 민족운동가를 탄압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05인 사건’이다.
 일제는 1910년 11월에 발생한 안악사건(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검거된 사건)을 계기로 서북지방에 민족운동가가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아카시는 1910년 7월 ‘이제 폭도봉기의 시기는 지나갔고 비밀결사를 주의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안악사건으로 그 가능성을 확실히 발견한 셈이었다. 일제는 서북지방의 민족운동가를 일소할 계획을 세웠다. 주요 타겟은 기독교 민족지도자와 선교사였다.
 1911년 10월 중순부터 기독교인들이 많은 서울, 평양, 선천 같은 도시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약 700명의 사람이 구속되었고 이들 중 123명(기독교인 82명)이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만으로 기소되었다. 혐의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 암살 모의였다. 일제는 이 조작사건에 선교사를 끼워 넣었다. 암살이 성공했을 때 그 소식을 즉각 해외에 알리기 위해 선교사가 모의과정부터 참여하였다는 낭설이었다.
 일제가 24명의 선교사를 이 조작사건에 연루한 것은 1910년부터 미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은 아시아의 식민지배를 놓고 경쟁하기 시작했고 가까운 미래에 미일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예측이 양 국가에서 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일제는 미국인이 한반도 내에 체류하는 것에 조금씩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국의 선교사들이 곤란에 처했다는 보고가 미국으로 갔지만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의 총무 브라운(Arthur J. Brown)은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그는 일제가 단순한 예방조치를 취하고 있을 뿐 본격적인 탄압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선교사가 체포나 입건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장의 판단은 본국과 달랐다. YMCA 총무로 한국에 와 있던 질레트(L. Gillett)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중국인 친구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것이 상해의 The China Press에 공개되면서 이 사건이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의 언론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한국에 특파원이 파견되어 재판을 취재하자 일제는 당황하였다. “문명국”을 표방하던 일제는 세계여론 악화에 심한 부담감을 느꼈다.
 1심에서 123명의 기소자 중에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이 105인 사건이라 불리는 이유이다. 그러나 법정에서 피의자들의 용기 있는 진술로 사건의 조작성이 드러났다. 판결은 세계 언론의 비난을 받았다. 그 결과 2심은 105명 중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6명에게만 실형을 선고하면서 혐의를 총독암살 “실행단계의 미수”에서 “준비단계의 미수”로 변경하였다. 이는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인정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1913년 10월의 최종 판결 후 수감되었던 6인은 1915년 2월 특사로 전원 석방되었다.
 기소자 전원이 풀려나는 데에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본부의 활동이 영향을 미쳤다. 사건 초기 선교본부는 일본 대사관에 공문을 보내 선교사들을 정중하고 우호적으로 대우해 줄 것을 요청하는 수준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사건의 조작과 고문사실이 드러난 이후에는 사건의 전말을 공개하는 The Korean Conspiracy Case를 작성하여 미국과 아시아 지역의 신문에 기고하면서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 미국 정부도 막후에서 일제에 이 사건을 기독교 박해로 보고 있음을 알리는 한편 선교본부는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는 등 원만한 사태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결국 일본 수상 오쿠마 시게노부는 조선총독에게 “금후부터는 선한 목적과 적절하게 활동하는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특별한 친절과 조력의 정책을 펼 것”을 지시하였다.
 105인 사건을 계기로 한일강제병합시기 주류 교회와 선교사들이 백만인구령운동을 추진하면서 선교사와 기독교 민족운동가 사이에 생겨나고 있던 불신과 불만이 누그러들었다. 교회가 민족운동가를 일제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큰 성과였다. 한편으로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기독교는 역시 고통과 수난을 통해 신앙의 성숙을 이룬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05인 사건이 기독교인을 노린 조작 사건임을 폭로한 선우훈은 조사 과정에서 고문과 회유를 받자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예예 개심하는 놈은 살려내어서, 고관대작 부귀영화 누리게 한다. 예예 개심할 수 없는 이 내 몸이니, 형장 아래 결박지고 꿇어앉아서, 쳐 죽이는 모듬매를 기다립니다. 스데반이 바라보던 열린 저 하늘, 내 주 예수 서신 것을 바라보면서, 내 영혼을 받으소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