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 정체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통로’라고 하셨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을 사람의 조건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을 대하듯 사랑으로 섬기는 진실한 실천적 신앙’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시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고 하셨습니다.(마 26:11, 요 12:8) 최근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우리 사회는 수많은 작은 자들을 양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모든 삶에는 종말이 있다
본문이 강조하는 메시지는 모든 인생에게 반드시 종말이 있고 그 종말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마 24장, 25장에서 예수님은 종말에 대한 교훈을 주고 계시는데 마 24장에서는 종말의 징조와 현상들에 대하여, 마 25장에서는 종말의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첫째 비유가 열 처녀 비유로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둘째는 달란트 비유로 하나님이 맡기신 달란트를 활용해서 풍성한 열매를 거두어야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 때 칭찬과 상을 받는다는 교훈입니다. 셋째 비유는 본문 말씀인데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말씀입니다. 첫 번 비유가 주님 앞에 서는 날을 위해 깨어 있어 준비하라는 교훈이라면 두 번째 비유는 그 기간 동안 충성하라는 교훈이고, 세 번째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교훈입니다.
종말은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개인적으로 삶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개인적 종말과 세상 끝날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 신앙고백처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우주적 종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종말을 맞이할지는 하나님께 속한 신비의 영역이지만 우리는 반드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날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들을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라는 말씀이겠습니까? 아니면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는 말씀이겠습니까?
2. 지극히 작은 자를 주님 대하듯
주님은 구원 받을 자들에게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고 칭찬하십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결정짓는 기준이 뜻밖에도 우리가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치고 외면하고 살았던 작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선행이라는 공로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 같은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하며 주변의 작은 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신앙의 진정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즉 진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았는가의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소개되는 작은 자들은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갇힌 사람 등입니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일용할 양식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냉수 한 그릇 마시는 것도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누구보다 많이 노력하고 처절하게 투쟁하듯 살아도 삶의 그늘진 굴레를 벗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제시된 작은 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종류의 작은 자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장애우들, 노숙인들, 외국인 근로자들, 탈북 난민들, 고독한 삶을 사는 노인들, 수용시설에 묶인 갇힌 사람들, 극빈 국가의 국민들, 선교지의 위기 상황 아래 있는 주민들, 전 세계의 난민들 등 수없이 많은 사람이 우리 주변의 지극히 작은 자들입니다. 이들을 향한 우리 마음이 얼음장처럼 차가우면 어찌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 할 수 있겠으며, 어찌 예수의 길을 따르는 제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자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긍휼과 사랑이 넘쳐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결실이 우리 삶 가운데 풍성히 맺혀지기 바랍니다.
3. 이 시대를 치유해야
주님께서 종말의 심판을 이렇게 작은 자들을 사랑하는 실천을 기준 삼으시고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고 하신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사랑의 실천이 병든 세상을 치유하고 그 온 세대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가장 뛰어난 선교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종말의 징조를 설명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험악해지고 살기는 더 어려워질 텐데 사랑까지 식어지는 악순환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와 비슷하게 예견한 바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마지막 때가 오면 진리와 정의의 바른 교훈 대신 이기심에 가득한 사욕 추구에 여념이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회 현실 지표 가운데 국민의 우울 수준이 36.8%로 OECD국가 중 1위를 기록하고 있고, 1인 가구가 전체의 39.2%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돌봄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은 급증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기심에 물들어 냉정함이 확산되고 사랑이 식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주님은 우리를 이런 세상에 보내시면서 그리스도의 향기와 편지로 살라고 하시고, 작은 이들의 친구가 되라고 말씀하시며 병든 세상을 치유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그리스도인은 최소한 남을 나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청지기들이요 상처 입고 병든 세상을 위한 치유자들입니다. 교회가 허영과 사치와 세상적인 세력 과시를 멈추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까지도 감당하시던 주님을 본받아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기는 사랑의 자리로 돌아갑시다. 그때 우리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고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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