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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9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

 1930년대는 다양한 신학적 충돌이 발생한 시기이다. 김춘배 목사의 여권논쟁 사건이 시작된 1934년에는 [만국주일공과]의 “창세기의 저자가 확실하지 않다”는 문구가 문제가 된 김영주 목사의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사건’과 미국 아빙돈출판사(The Abingdon Press)에서 간행한 주석서 The Abingdon Bible Commentary가 성서 비평학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된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이 발생했다.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사건’과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은 모두 장로회와 감리회의 학자들이 함께 발행한 책이 장로회에서 문제가 된 사건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신학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던 감리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들이 장로회에서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여권논쟁의 김춘배 목사와 ‘창세기 모세 저작 부인사건’의 김영주 목사가 모두 일본 유학파 신학자로 감리회 계통의 관세이가쿠인(關西學院)대학에서 수학한 것을 고려하면 1930년대 중반의 신학적 충돌은 장로회 신학과 감리회 신학의 충돌로 볼 여지가 상당하다.
 세 사건 중 가장 본격적인 신학 충돌은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이다. 1930년 간행된 아빙돈 사의 주석서는 1934년 한국에 번역되어 감리회 출판사인 신생사(新生社)에서 역시 감리회 교육국 총무인 류형기 목사의 책임번역 및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책의 이름은 [단권성경주석]이었다. 방대한 분량의 책이었기 때문에 전체 번역자는 53명에 달했다. 번역자를 살펴보면 당시 신진 신학자들이 총동원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감리회에서는 양주삼, 정경옥, 김창준, 전영택, 변홍규 등이, 장로회에서는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 채필근, 김관식, 조희렴, 윤인구 등이 참여했다. 변역자의 대다수는 미국 유학파였다.
 이 주석서의 특징은 당시 미국의 신학 경향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서비평, 역사비평, 고등비평 등의 방법이 활용되어 있었다. 이런 비평학은 성서를 좀 더 원뜻에 가깝게 읽어내기 위한 방법론이었는데 현재의 성서신학에서 보기에는 낮은 단계의 연구방법이지만 당시 한국에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진보적인 것이었다. 감리회는 번역자들이 당시 감리회의 주류를 형성하던 인사들이었고 감리회의 신학적 분위기가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이 주석 번역으로 인한 문제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주석의 서문을 쓴 류형기는 오히려 이 책이 학구적이면서도 복음적인 명저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이었던 장로회는 격랑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성서비평학을 수용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성서가 쓰인 당대의 역사적 맥락, 내용의 문학적 요소, 수사학, 저자가 참고한 자료, 그 자료의 편집구조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성서를 비평하는 것이 성서가 가지고 있는 권위를 무너뜨리는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비평학은 이단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장로회에는 성서를 분석이나 해석하지 말고 적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자주의적 성서이해인 문자무오설(文字無誤說)과 축자영감설(逐字靈感說)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주석서가 출판된 1934년 장로회 총회에는 황해노회장의 헌의서가 제출되었다. 내용은 ‘이 성서주석을 불매할 것을 선언하고 장로회의 각 기관에서 활용되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춘배 목사나 김영주 목사의 사건과 이 사건은 좀 다른 점이 있었다. 앞의 두 사건은 장로회 목사 한 명에 대한 처벌을 총회에서 결정하면 될 일이었지만 이 사건은 감리회와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총회 차원에서 이 문제에 개입하여 번역자를 이단성이 있다고 치리해 버리면 함께 번역한 감리회와 불화가 생길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1935년 총회는 ‘장로회 교리와 맞지 않는’ 주석서의 불매를 결정하면서 번역자에 대한 치리는 각 노회에 일임해 버렸다. 이제 공은 노회로 넘어갔다.
 그런데 장로회도 각 노회에 따라 서로 다른 신학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회에 따라 이 문제를 처리하는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개방적이었던 서울의 경성노회는 이 문제를 크게 다루지 않았지만 보수적인 평양노회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했다. 노회 심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평양지역의 원로인 길선주 목사는 이 주석서를 ‘이단서’로 규정했다. 평양노회에는 한경직, 채필근, 김재준, 송창근 등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 중 채필근은 빠르게 사과하고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였다. 한경직, 김재준, 송창근은 한 달 정도 버티다가 장로회의 기관지인 「신학지남」에 사과도 변명도 아닌 ‘유감의 뜻’을 표하는 애매한 글을 쓰고 문제를 무마했다.
 아빙돈 단권 주석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여파는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린스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한경직, 송창근, 김재준은 귀국 후 한국의 신학발전을 이끌어 가야 할 인재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사건 이후 새로운 신학적 연구나 토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 결과 장로회 안에서는 더 이상 활발한 신학적 토론이나 논쟁이 발생하지 않았다. 신학의 발전이 멈춘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해방 이후에 치러야 했다. 자유주의 신학 논쟁으로 예장과 기장이 분열한 것이 그 대가였다. 신학을 연구함에 있어 학문과 사상, 의사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억압되면 하나님 말씀의 본래 의미 파악에 멀어지게 되어 신학의 발전과 교회의 일치를 이루기 어렵고 지나치게 학문의 자유만 강조하면 신학적 오류와 교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1934년 장로회에서 발생한 신학자들과 교회의 충돌이 모두 합리적 연구 토론보다 교권에 의해 강압적으로 막을 내린 부분은 이런 방법이 훗날 장로교 교단 분열의 요인이 된 것을 생각하면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