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고난을 당하실 것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사 53:4,5)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았던 시므온은 주의 모친 마리아에게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눅 2:35)라고 예언하며 앞으로 예수님께 다가올 모진 고통을 말해주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 모두 세 차례입니다.(마 16:21, 마 17:22,23, 마 20:18,19) 이런 말씀은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었는데 본문은 그 가운데 첫번 째 예언의 말씀입니다.
스위스 신학자 에밀 브룬너(Emil Brunner 1880-1966)는 ‘예수는 예수처럼 죽었고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처럼 죽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악법에 의한 억울한 죽음이라 해도 그것은 철학적 사건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의 근본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죽음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 일을 위해 오셨고 그 죽음을 향해 전진하시며 죽음으로 죽음을 정복하시는 능동적이며 자발적 죽음이었습니다.
1. 주님의 질문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주님은 제자들과 빌립보 가이사랴에 가시어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세간에 회자되는 여러 말들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 지 못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재차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이 대답에 매우 만족해하시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반 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출발하시기에 앞서서 제자들의 믿음을 점검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이스라엘의 최북단에 위치한 곳으로 구약시대에는 이곳이 단 지방이었습니다. 단과 같은 변방의 땅은 다른 민족들과 인접해 있어서 언 제나 외부 세계와 소통이 빈번했기 때문에 이방문화의 유입이 자연스럽 게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신앙적 혼합도 극심했습니다.(삿 18:30,31) 또 왕상 12:25이하에서도 단 지방이 우상숭배와 혼합종교의 중심지가 되어 북왕국 이스라엘을 타락시키는 원천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신이 신약시대에까지도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빌립보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 가이사 아우구스투스가 헤롯에게 넘겨주었고, 헤롯은 이 곳에 가이사의 신전을 건축하여 헌납했습니다. 헤롯이 죽고 그 아들 헤롯 빌립에게 이 도시가 넘어갔는데 빌립은 이곳을 큰 도시로 확장하면서 빌립이 가이사에게 바친 도시라는 의미로 빌립보 가이사랴가 된 것입니다. 그 곳에는 각종의 로마 신들을 위한 많은 신전들을 건축되었습니다.
주님은 우상이 가득한 도시, 신전들이 줄지어 서있는 도시, 가이사가 세상의 구주라고 찬송하는 이 참람한 도시의 한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이때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계획하시고 그 결심을 제자들에게 밝히시면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게 될 당신이 누구인지를 제자들에게 확인 시키신 것입니다.
2. 주님의 책망 -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
위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그들에게 주님은 비로소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십자가의 고난을 드러내어 밝히셨습니다.(31절) 그런데 이 말씀에 뜻밖의 저항이 생겼습니다. 또 다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 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33절) 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어쩌면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스승이 죽음의 길로 가신다는데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제자의 도리입니다. 그래서 일말의 망설임과 양해도 없이 그를 사탄이라 부르시며 맹렬히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 서 꼭 왕이 되셔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실 것이라 믿는 믿음이 있었고, 이 일을 위해 그들도 의기투합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반발하고 저항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실 것으로 알고 서로 자리다툼을 했고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도 그랬고 부활하신 후에도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습니까?’라며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정치적 야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주님의 십자가로 가시는 것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도 이런 유혹은 언제나 있어왔습니다. 이단의 출현, 교회의 분열, 급진 신학의 등장 등은 언제나 교회로 하여금 십자가 복음 증거를 훼방당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물론 교회는 세상의 칭찬과 존경을 얻도록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나라의 정치 현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사회적 변화에도 민감해 야 하고, 이 땅의 문화를 새롭게 하는 일들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올바른 정치적 선택이 국민적 의무이며 선한 일들도 우리의 마땅한 도리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책임은 십자가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일에 귀결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전파는 생명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일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혁을 가져오는 가장 든든하고 신속한 길이기도 합니다. 어떤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이념이 세상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선 증거 될 때 세상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3. 주님의 당부 -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의 모든 유혹과 인간적 우려를 외면하신 채 갈 길을 재촉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리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당 부하셨습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능력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요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자세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동력도 내가 아니요 인생 목적도 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함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기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이미 지고 있는 자기를 위한 짐을 내려놓 아야 주님의 짐을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고 섬긴다고 하면서 희생과 자기 부인과 십자가 짐이 없는 위선적 종교놀이만 한다면 무엇이 가능하겠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이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자기 생명을 구원하 고 다른 사람도 구원하는 진실한 주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길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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