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의 지위 상승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고, 남녀평등을 기독교의 특징으로 보았다. 1920년대 중반부터 기독교 잡지에는 기독교와 남녀평등을 연결시키는 글이 나왔다. 일례로 샤프 선교사(Charles E. Sharp)는 1926년 장로회의 신학잡지인 ?신학지남?에 “예수의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그 뜻을 깨달아 알고 여자의 지위를 이전보다 높게 대접하였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퍼지는 결과 가운데 한 가지 큰 결과가 되는 것이니라”라고 기술했다.
감리회의 잡지인 ?신학세계?에는 여성 선교사들이 1926년부터 1932년까지 12편의 글을 실었다. 역사상 중요한 여성 기독교인을 소개하고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지지하는 글들이었다. 급여와 교회 내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것이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장로회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었지만 샤프 외에도 남궁혁이 2편 정도의 글에서 ‘서양 여자의 자유와 지위는 기독교의 인권존중의 교훈으로 발생한 것’이라며 여성의 권리에 관심을 보였다.
1920년대 후반은 근우회의 조직으로 한국사회 전반에서 여성들의 사회참여와 권리주장이 조금씩 활발해지던 시점으로 교회 안에서도 여성의 지위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교회 내부의 남녀평등 문제는 먼저 감리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 결과 1930년 미국 남북감리회 선교부가 통합하며 조직한 ‘기독교조선감리회’는 남녀평등을 기본원칙으로 선언했다. 조선감리회는 1931년 교단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교리와 장정’에 교직자의 자격에 남녀구별이 없다고 명시하면서 남녀평등을 법제화하였다. 그리고 그해 실제로 여성 선교사 14명을 목사로 안수했다. 미국에서도 여성의 목사 안수는 허용되지 않던 시기에 발생한 파격적인 일이었다.
감리회의 여성안수는 장로회에 영향을 미쳤다. 1933년 함남노회 여신도 104명이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발언권과 치리권을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노회에 제출했다. 이 청원서는 총회에 올라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34년 함남노회의 여신도들은 다시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번에는 639명의 여성이 힘을 합쳤다.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 커진 것이다. 그리고 김춘배 목사가 총회 직전에 이를 지지하는 글을 ?기독신보?에 기고했다.
“부결한 원인이 어디 있는지 이해에 힘 드는 바이외다. 아직까지도 남존여비의 낡은 풍습을 고수함도 아닐 것이요, 여자는 거내이불외(居內而不外: 집 안에 살며 바깥일을 말하지 않는다)하라는 권위가 된 도덕을 지키느라고 그러는 것도 아닐 것이요, 여자는 조용히 하여라 여자는 가르치지 말라는 이천 년 전의 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알고 그러는 것도 아닐 터인데요.”
김춘배는 이어 감리회는 벌써 여목사까지 있는데 장로회에서는 여성차별적인 헌법을 두는 것이 모순일 뿐 아니라, “남녀평등이니 여자해방이니를 강단에서 외치는 우리의 주장과는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이 법을 하루를 더 둔다면 우리 스스로를 하루 더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큰 파문이 일었다. 특히 성서의 본문 내용을 ‘이천 년 전의 한 지방 교회의 교훈과 풍습’이라고 말한 것이 보수적인 인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934년 장로회 총회는 김춘배의 발언에 대한 연구위원회를 꾸렸고 이들은 1년 뒤 총회에서 연구결과를 보고했다. 주된 내용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 여성의 교권을 불허한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것이었다. 연구위원회는 김춘배의 성서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보고 “교역자됨을 거절”할 것을 보고하였다. 목사 안수 취소를 요청한 것이다. 이제 문제는 남녀평등에서 성서해석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김춘배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한다는 석명서(釋明書)를 발표하고 물러서야 했다. 이런 감리회와 장로회 사이의 사뭇 다른 분위기는 이듬해 발생한 “아빙돈 단권주석 사건”에서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감리회는 해방 이후인 1955년 한국인 여성, 전밀라와 명화용에게 목사 안수를 주었다. 처음부터 부부를 함께 교육하여 목회자로 양성하는 구세군이나 특정 인물의 카리스마가 강하게 작용하는 군소교단의 예외적인 경우를 빼면 한국 여성이 목회자가 된 첫 번째 사례라 할 수 있다. 장로회 중에는 1956년 여성 장로 제도를 채택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여성안수가 가장 빠르다 할 수 있는데, 여성이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은 1977년으로 한참 후의 일이었다. 우리 교단은 1995년이 되어서야 여성 목사 안수를 허용하고 1996년 여성 목사를 배출하였다. 성결교회와 침례회, 장로회 백석 등은 21세기에 들어와 여성 안수를 허용하였지만 여전히 장로회 합동이나 고신, 합신 등 더욱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허용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 여성이 교회의 중요한 리더십이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일례로 1997년부터 여성 목사안수를 허용해 온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는 5월 여의도지방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49명 가운데 47명이 여성인 독특한 현상을 보였다. 곧 여성들이 남성과 차별 없이 교회를 이끌어 갈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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