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는 오는 27일 이종윤 목사님이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음에 즈음하여 이종윤 목사님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다시금 조명해 본다.(편집자 주)
창립 이래 20년 가까이 우리 교회 성도들은 이종윤 목사를 통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수없이 들어왔다. 20대의 청년 신학생 이종윤이 평생의 신학의 방향 설정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준 학교, 웨스트민스터는 어떤 곳인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1929년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세워진 신학교다. 이 신학교가 개교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미국 신학계에서 주류를 이루던 칼빈주의 신학과 그에 맞서 20세기 초엽부터 범람하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간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
그 진앙지는 '장로교의 어머니’라 불렸던 프린스턴 신학교였다. 프린스턴은 개교 이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교리와 신학의 표준으로 삼고 개혁주의 신앙을 견지했지만, 자유주의에 물든 인사들이 학교 이사와 교수들이 들어오면서 보수적 신앙이 점차 퇴색해갔다.
이에 맞선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마침내 프린스턴 신학교를 뛰쳐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다 철저히 따르며 성경무오설에 근거한 정통 성경적 신학을 굳게 지킬 신학교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웨스트민스터였다.
학교 설립을 주도한 교수들 가운데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교수가 있었다. 그는 변증학 교수로서, 기독교 정통 신학 수호에 크게 이바지한 신학자다. 청년 이종윤은 이 반틸 교수의 문하에서 끈끈한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어가며 그도 정통 성경신학의 파수꾼이 되어 갔다.
매 학기 과목당 1,500페이지 이상의 독서, 매주 500개 이상의 히브리어 단어 암기 등 웨스트민스터 교수들이 요구하는 학습량은 신학생들에게는 가혹한 분량이었다. 이 목사는 이를 소화하고자 밤잠을 줄여가며 공부하다가 급기야 새벽에 기숙사의 세면장에서 졸도하여 응급실로 실려 가는 일까지 있었다. 이처럼 사투에 가까운 노력을 하던 이종윤 목사는 반틸 교수로부터 가장 훌륭한 기말 리포트를 냈다는 칭찬과 A+학점, 그리고 교수의 친필 사인이 적힌 책을 상으로 받기도 했다.
1971년 웨스트민스터를 졸업하고 유럽의 세인트앤드류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76년 한국에 들어온 이 목사는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면서 한국 교계의 거목으로 커간다. 그 후 30여 년간 웨스트민스터의 가르침을 토대로 철저히 정통 보수적 신학에 입각해 목회와 학문적 활동을 해온 이 목사는 2004년 한국기독교사학회로부터 '한국교회 10대 설교가’로 선정됐고, 2006년엔 한국교회가 일제 강점기부터 사용해 온 주기도와 100년 가까이 고백해온 사도신경의 새번역위원장을 맡아 새번역을 완수했다. 특히, 사오분열된 한국의 장로교회들이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헌법에 공유하고 있다는 공통점에 착안해 장로교의 정체성 회복과 연합과 일치를 위한 '장로교의 날’ 창설을 주도했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 발전과 신앙 확산에 기여한 공로로 이종윤 목사는 2008년도 장신대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오는 27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또 한번 받는다. 박형룡, 박윤선 목사를 비롯해 정통 보수 신앙의 계보를 이어온 수많은 한국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웨스트민스터를 거쳐 갔고, 현재도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모교로부터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경우는 흔치 않다.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20년을 달려온 서울교회의 정체성은 이종윤 목사를 매개로 웨스트민스터의 개혁주의 신앙 전통과 보수적 신학의 자양분을 먹으며 형성돼왔다는 점에서 이종윤 목사의 명예신학박사 학위는 그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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