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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6
보빙사절단의 방미와 선교의 윤허(允許)



정치·외교의 영역인조약 체결·공사관 설치·사절단의 방미는 한국 선교가 추진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첫 선교사의 내한으로 이어졌다. 교회는 세상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기에교회사 역시 일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1882년 5월 22일 조선과 미국은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871년 발생한 신미양요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하게 고수하던 조선이 입장을 바꿔 조약을 체결한 것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저지하고자 했던 청나라가 중재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서양 국가와 최초로 맺은 통상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나 선교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학자를 파견하여 조선의 언어와 문학, 예술을 연구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고 이해하였다.
 조약의 결과 1883년 5월 푸트(Lucius H. Foote)가 초대 주한미국 공사로 내한하였다. 푸트는 고종을 만나 미국에 친선사절단을 보낼 것을 건의하였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여 특명전권공사 민영익을 필두로 사절단이 구성되었다. 흔히 이 사절단을 보빙사 또는 견미사절단 이라고 부른다. 보빙사는 1883년 7월 출발하여 일부는 미국을 방문하고 12월에 귀국하였고, 또 일부는 미국 순방을 마치고 유럽을 들렀다 1884년 5월 귀국하였다. 그런데 보빙사는 한국 선교의 공식적인 개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보빙사는 1883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시카고로 이동했는데 이 기차에는 가우처(John F, Goucher) 박사가 타고 있었다. 미감리회의 목사인 가우처는 사절단을 만나 조선의 이모저모를 알게 되면서 조선 선교를 염원하게 되었다. 그는 11월 미감리회 본부에 조선 선교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며 2천 달러를 기부하였고 이어 1884년 1월 감리회의 일본 선교사인 매클레이(Robert S. Maclay) 에게 조선을 방문하여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할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같은 시기 일본과 중국에서 활동 중인 미국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통한 조선 선교 개시를 요청하고 있었다. 이들은 계속해서 기독교 언론과 잡지에 호소문을 싣고 이수정이라는 조선인도 선교를 호소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수정의 호소를 접한 미국장로회는 조선 선교를 모색하기 시작해 1884년 4월 의사인 헤론(John W. Heron)을 최초의 한국선교사로, 7월에는 목사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를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우처의 요청을 받은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24 일부터 7월 8일까지 조선을 방문하였다. 그는 6월 30일 이미 일본에서 교분을 쌓았던 김옥균을 만나 고종에게 ‘의료와 교육사업’의 허락을 받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7월 3일 매클레이를 다시 만난 김옥균은 원하던 대답을 들려주었다. 고종이 매클레이의 제안을 신중하게 검토한 후 허락하였다는 것이었다.
 매클레이는 푸트 공사에게 이후 내한할 선교사들을 위해 미국공사 관 근처의 경사진 땅을 매입할수 있게 주선해 달라고 부탁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본국에 선교 윤허가 났음을 알렸다. 매클레이의 보고를 받은 미국의 감리회도 조선 선교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1884년 말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박사,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Scranton),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등을 한국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한국에 가장 먼저 정주한 것은 앞서 언급한 이들 중 한 명 이 아니라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 그는 1883년 중국선교사로 파송 받았지만 1년이 다 되도록 현지에 적 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안타까워한 주변에서 알렌에게 조선행을 권유하였고 알렌은 조선에 외국인들을 위한 의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선에 가기로 결심했다. 1884년 7월 북장로회 선교부로 부터 조선행 승인을 받은 알렌은 9월 미국공사관 의사 신분으로 조선 에 들어와 최초의 내한선교사가 되었다. 알렌은 미국공사관 인근의 집을 매입하여 사택으로 삼았는데 이곳은 현재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로 유명한 덕수궁 중명전이 위치한 곳으로 앞서 매클레이가 점찍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이처럼 정치 외교의 영역인 조약 체결과 공사관 설치, 사절단의 방 미는 한국 선교가 추진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첫 선교사의 내한으로 이어졌다. 교회는 세상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기에 교회사 역시 일반 역사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이 과정의 첫 매듭을 지은 가우처는 ‘에티오피아 내시 앞에 나타난 빌립’에 비유되며 ‘은둔의 나라’의 복음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