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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9
일본 내에서의 성서번역과 조선의 마케도니아인



이수정이 한국기독교 역사에 미친 영향은 성서번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조선인 유학생과 교사들을 적극적으로 전도···도쿄 최초의 조선인 신앙공동체까지 생김.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

 만주에서 쪽 복음서의 형태로 성서출간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일본에서도 성서번역이 시작되었다. 만주의 성서번역과 일본의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만주가 민중 계층 전도에 목적을 두고 순 한글로 성서를 번역하며 여러 명의 조선인들이 대부분 몇달에서 1년, 가장 길게는 약 6년 동안 성서번역에 동참했다면, 일본은 지식인 계층의 전도를 위해 한 명이 한자에 일본식 토를 다는 형태 또는 국한문 혼용으로 짧은 기간 안에 번역하였다.
 만주에서는 번역 착수에서 성경전서가 출간되기까지 10년의 시간이 걸린 반면, 일본에서는 신약의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번역에 약 한달 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만주의 번역은 한문성서를 한글로 1차 번역하고 이를 "개정 그리스어 성경"을 기준으로 2차 번역한 뒤, 그리스어 성구사전과 메이어 주석 등을 참고하여 총 4차 번역까지 진행하였기때문에 수고와 시간이 많이 들어갔지만 일본의 번역은 한문성서에 우리말 토를 다는 간단한 방식이었다. 일본에서의 번역이 이렇게 간편한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우선 간단한 번역을 시도하고 이후에 이를 경험삼아 완전한 한글번역을 한다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해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한 것을 보면 번역자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지식인임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성서를 번역한 사람은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으로 불린 이수정이다. 1882년 6월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일본 영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피해를 입자 조선 정부는 8월 10일 박영효를 전권대신을 겸한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는 한편 31일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때 이수정은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함께 일본에 건너갔다. 이수정은 앞서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방문하고 온 친구 안종수로부터 기독교인 농학자 쓰다 센(津田僊)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일본에 가면 꼭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쿄에 도착하여 쓰다 센을 만난 이수정은 곧 기독교에 빠져들었다. 쓰다 센의 집에는 산상수훈이 족자로 걸려있었는데 이를 본 이수정이 쓰다 센과 산상수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기독교로 대화의 주제가 이어졌다. 쓰다 센은 이수정에게 한문 신약성서를 선물로 주었고 원래 기독교에 대해 관심과 지식을 갖고 있던 이수정은 매일 성서를 읽으며 기독교 교리를 연구했다. 그리고 그해 성탄절에 도쿄의 장로교회인 쓰키지교회를 방문하고 감동을 받았다. 결국 이수정은 일본 체류 7개월 만인 1883년 4월 녹스(G. W. Nox)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enry Loomis) 목사의 제안으로 1883년 5월부터 성서번역에 나섰다. 6월 현토성서인 『현토한한 신약성서』 번역을 마무리한 이수정은 곧 이어 한글번역에 나섰다. 제일 먼저 마가복음을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이수정은 일본어 마가복음과 만주의 한글 번역성서를 참고하여 1884년 4월, 국한문 혼용의 『신약마가젼복음셔언히』번역을 마무리하였다. 이 마가복음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일본에 도착할 때를 맞추어 6천 부가 간행되었다. 덕분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개척선교사가 그 나라 언어로 번역된성서를 들고 입국하는 진귀한 사례를 남겼다.
 이수정이 한국기독교 역사에 미친 영향은 성서번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수정은 기독교인이 되자마자 조선인 유학생과 교사들을 적극적으로 전도하여 1883년 6월부터 결실을 맺기 시작했고 연이어 여러명이 세례를 받게 되면서 연말에는 도쿄 최초의 조선인 신앙공동체까지 생겼다. 또한 이수정은 미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선교를 고심하던 일본 주재 선교사들에게 이는 “근대선교사상 가장 괄목할 만한 사건으로, 너무 좋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조선선교를 요청하는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을 녹스 선교사가 본국에 알리자 미국교회는 이수정의 요청을 “조선의 마케도니아인의 부름”이라고 불렀다.
 이수정은 한국의 선교는 반드시 미국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선교에 일본교회가 관심을 갖자 선교지망생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수정은 이를 단호히 반대하였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복음이 조선에 들어온다면 그것이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선교사 파송을 요청한 이수정의 호소는 미국 각 교단의 선교사 파송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