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이나 수상한 사람을 보면 항상 짖던 개가 갑자기 짖지 않게 된 것을 보고 새벽마다 고고한 소리로 울던 닭이 달님에게 고발을 하였다. 이는 직무유기요 무사안일주의에 빠진 비리라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짖지 못하는 개가 요즈음 닭도 새벽에 울지 않고 있다고 맞고소를 하였다는 우화가 있다. 그들의 고발에 대한 변명은 우리를 더욱 웃게한다. 닭이 새벽에 우는 이유는 주인에게 시간을 알려 주기 위함인데 요즈음 방마다 시계가 있고 자명종이 있으니 구태여 자기가 울어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의 대답은 더 걸작이다. 본래 개는 도적이 침범할 때 짖는 법인데 요즘엔 자기집 주인이 대도(大盜)가 되었으니 누구를 보고 어떻게 짖으라는 말이냐고 도리어 항변을 했다. 책임을 못다한 짖지 못하는 개, 은총에 보답을 못다한 울지 못하는 닭, 그들의 사정도 딱하지만 그들을 애완용으로만 두고 볼 수도 없지 않은가!
사람이 짐승보다 낫다고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 면전에서 피조물로서의 책임과 받은 은총을 보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신문지 위에 던져진 찬밥 한 덩어리 얻어 먹고도 주인이 집에 돌아오면 앞발을 올려 환영하고 감사의 꼬리를 흔드는 개도 있는데 사람 중에는 보답은 해야겠는데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 지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내게 주신 사명과 나를 부르신 소명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감당할까?
너무 크신 은총 때문일까? 베다니의 마리아는 값비싼 옥합을 깨뜨려 주님 발에 부어 드렸다. 그와 그 가정이 받은 은혜에 비하면 이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삼백 데나리온은 족히 받을 귀한 향유를 몽땅 부어드리고도 오히려 부끄럽다는 생각에 머리를 들지못했다. 낭비라고 책망하는 이도 있었지만 거룩한 낭비는 은혜 받은 자만 맺을 수 있는 책임있는 행실의 열매다. 은혜 받은 자의 책임을 못하는 명목상의 신자들을 보시고 마지막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탄식하시는 주님 앞에 송구스럽게 머리를 들지 못할 내가 아닌가?
너무 많은 은총 때문일까? 이것을 감사하고 나면 저것이 남았고 저것을 찬송하고 나면 또 이것이 빠졌다. 종일 감사해도 못 다할 감사요, 만입으로 찬송해도 다 못할 은총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짖지 못하는 개처럼 핑계만 대고 받은 은혜를 보답은 커녕 기억조차 못하는 내가 아닌가?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죄인이 바치지 못한 핑계가 왜 그리 많은지 부끄럽기 그지없다. 이를 감사하기 위해 저를 드리고 저를 감사하기 위해 이를 드린다고 하지만 그러나 드리는 그것까지도 역시 주께 받은 것이고 보니 대단한 보답이 될 것 같지도 않다. 무릇 은혜는 적은 것이라도 크게 받을 줄 알아야 한다. 겨우 한 달란트냐고 불평하면 그것까지도 잃고 만다. 작은 은혜에도 크게 감사하는 이에게 은혜는 더 커가는 법이다.
끝없는 은총이기 때문일까? 드릴수록 오히려 입혀 주시는 은혜가 커가기만 하니 무엇으로 이 한이 없는 은혜에 보답할꼬? 그러기에 여간한 정성을 드렸다고 보답이 다 된 줄로 알아서는 안되며 아무래도 갚을 수 없는 은혜라 해서 처음부터 보답을 단념해서도 안된다. 보답을 힘써보나 보답할 수 없는 은총임을 알아야 하고 보답을 다 한다 할 수는 없어도 보답을 해 보려고 애는 써야 한다. 나라의 기둥이 흔들리고 사회의 언덕이 붕괴되고 있는데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책임도, 능력도 없다는 듯이 수수방관만하고 있으면 책임과 보답을 못한 짖지 못한 개가 아닌가? 은혜의 막중함을 깨닫는 것이 곧 보답의 길이란 생각이 든다.

이종윤 목사
<한국기독교학술원장ㆍ서울장신대석좌교수ㆍ서울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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