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담 자: 이종윤 목사(서울교회 원로목사, 기독교 학술원 원장)
박효종 교수(서울대 윤리학과 교수)
사 회 자: 최재분 본지 발행인
대담일시: 2011년 6월 21일(화요일)
대담장소: 월간 <신앙세계> 사옥
일반적으로 서구에서 말해지는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는 복지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와 관련하여 국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다.
정치학자 이스톤 (D. Easton)은 정치를 ‘사회적 가치를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지만, 지금 우리의 정치권은 복지와 같은 사회적 가치를 둘러싼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해 나가기보다는 오히려 포퓰리즘적 복지정책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는 양상이다. 이미 이러한 복지 포퓰리즘은 작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야당과 진보성향의 교육감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위력을 보였고, 또한 내년에 치러질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복지 포퓰리즘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에서 복지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은 중요해졌다.
7월호 시사대담에서는 국내 최초로 지적장애인을 위한 호산나대학과 대안학교인 호산나학교를 세우는 등 복지문제에 깊은 관심과 열정을 쏟아온 기독교학술원 원장이신 이종윤 목사님과 이 시대의 다양한 사회현상과 가치, 윤리의 문제 등에 깊이 있는 연구와 활발한 사회활동을 해오고 계신 서울대학교의 박효종 교수님을 모시고 복지의 포퓰리즘 현상에 대한 심층적 진단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성찰하는 대담을 나누었다.
최재분
최근 복지문제가 크게 확대되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복지 포퓰리즘 현상에 대해 국민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학등록금 반값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 정치권의 반값등록금 추진 발언, 작년 지방선거에서 이슈화된 무상급식의 주민투표로의 진행 등 많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는 양상입니다.
우리가 복지국가, 선진국가를 지향하고 있으나 이 같은 복지 포퓰리즘으로 접근한다면 과연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중요한 문제들이 제대로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도 않고 정치인들의 당리당략과 집단이기주의로 다뤄진다면 국가장래에 큰 재앙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이제 복지문제를 심층적이고 다각적으로 접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전부터 교계에서 복지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다루어 오신 이종윤 목사님께서 먼저 말씀을 열어주시지요.
이종윤 복지와 관련하여 최근 진행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대개 복지를 하면 얻어지는 결과를 얘기합니다만, 저는 왜 복지를 해야 하는지 그 동기를 먼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은 동기를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1장에서 “너희 의(義)를 보려고 사람들에게 행치 마라”고 말씀하시는데 구제하고 선한 일 하는 것을 의로 보시며, 이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포퓰리즘에 빠지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을 르네상스 이후에 많이 사용했는데 나는 인간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아이큐, 성격, 생각의 폭, 깊이 다 다릅니다. 인간은 평등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평등하지 못한 것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복지라면 그 동기가 선해야 할 것입니다. 평등하지 못한 문둥이들을 하나님께서 사람대접 해 주신 것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우리가 도와주고 같이 살자고 하는 그런 복지를 하나님 앞에서 해야 그것이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고, 그것이 제대로 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복지문제를 사용하려 한다면 대중영합주의로 갈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결코 건전한 복지정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최재분
인간은 평등하냐 아니냐 하는 것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영적 가치에서 보면 인간은 평등하지만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는 차이가 있겠죠. 우리가 공정사회를 지향하면서 나갈 때 경제적인 면에서, 국민의식 수준면에서 과연 복지문제를 제대로 다뤄 수 있을 것인가. 지금까지 복지 문제가 이렇게 강렬하게 대두된 적은 없었어요. 우리가 어느 정도 빵문제를 해결하고 GNP가 높아지면서 공정사회 이야기가 나오고 분배와 복지문제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흐름에 편승해서 정치인들은 복지를 경쟁적으로 포퓰리즘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님은 이러한 복지 포퓰리즘 현상에 대해 어떠한 진단을 하고 계시는지 말씀을 해주시지요.
박효종
먼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문제는 건강하고 건전한 공론화 과정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나중에 와야 하는지 우선순위에 대한 논의 없이 무조건 인기를 얻고 보겠다는 포퓰리즘의 저급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등록금 반값 주장도 마치 시장 물건 값을 반값으로 흥정하는 모습 같습니다. 반값등록금, 무상급식뿐 아니라 무상교육, 무상의료, 반값아파트 등의 이슈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무상복지’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는 데는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의 책임이 크다고 봅니다.
포퓰리즘은 로마의 포퓰로스, 영어로 하면 피풀(People)에서 나온 것인데, 값을 치루지 않고 자기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소망하는 것으로 사실 공짜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리비우스라고 하는 역사학자가 《로마사》를 썼는데 나중에 마키아벨리가 쓴《로마사 논고》에는 “당시 가장 큰 부자였던 스푸리우스 멜리우스라는 사람이 사적으로 곡물을 모아 자신의 비용으로 평민들에게 식량을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하였다가 그의 관대한 발상이 낳을 수 있는 분란을 우려한 나머지 원로원에서 그를 처형하고 말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를 해석하기를 로마인들은 공짜로 제공하는 복지는 무언가 다른 대가를 수반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이를 초기에 차단했다는 것인데 여기서 그 대가는 자유라고 할 수 있는 거죠.
목사님께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풍비하고 있는 복지 문제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 이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거기에 아주 공감을 합니다. 복지 포퓰리즘을 목사님이 말씀 하신 동기의 측면에서 보면 내년 총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지 표를 많이 얻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무상복지의 재원이 어떻게 나오고, 세금은 어떻게 되고,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책임 있게 얘기하고 있지 않는 정치인들의 부정직한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이 우려가 매우 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재분
과연 어떤 복지로, 어떤 혜택이, 어떤 사람들에게, 어떻게 주어지면서 사회가 공평하게 갈 수 있을 것인가는 모든 나라의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제에서 ‘성장이냐 분배이냐’의 이슈도 결국은 국가라는 공동체를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운영해 나갈 것이냐의 문제라고 봅니다. 한 나라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시장의 지속적인 성장도 필요하고 사회통합적인 측면에서의 복지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 지방선거에서 무료급식과 같은 복지를 주장한 야당과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었습니다. 반값 또는 무료로 가자는 주장이 지금 이 사회에 맹렬합니다. 저는 이러한 흐름이 단지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복지 포퓰리즘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종윤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 네가 가진 넉넉한 것으로 부족한 사람을 도와줌으로 균등케 하리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약자를 돕는 겁니다. 복지정책이라는 것은 약자를 돕는 것이지요. 시편 68편 4-5절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하셨어요. 재판장은 디펜더(defender) 방어자를 뜻합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신들은 왕의 신, 가진 자 편에서 축복하는 편이었는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고 과부의 방어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약자를 도우라는 것이 성경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이 말합니다. 약자를 돕되, 정의는 행동하는 거라고요. 그 정의의 모티브는 인자입니다. 인자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약자를 돕는 것이지요. 약자를 도우라는 것이 성경의 원리인데, 지금 사회적 약자를 도와야 할 국가가 돕는 척 하면서 하는 게 잘못 되었다는 거죠.
욥기서 29장에는 하나님이 나는 네 눈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자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고, 포획한 물건을 그 입속에서 빼앗았노라고 하십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 국가이고, 또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복지정책은 꼭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박효종
차별하지 말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하자는 보편적 복지의 논리는 만약에 구분해서 주면 나중에 받는 사람들이 부끄럽게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복지학자들은 이를 보편적 복지의 ‘낙인효과’라고 하는데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층, 중층, 상층의 소득 수준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수준의 복지를 제공한다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고기를 직접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기술을 주어라는 게 있어요. 가난은 단순히 공짜로 무언가를 준다고 해서 해결 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복지를 해보고 난 후의 결론입니다. 무상복지는 혜택보다는 독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들에게 의존감을 불러일으키고 열심히 일하려는 노력을 안 하게 만듭니다. 어려운 사람 도와준다는 고귀한 정신이 오히려 국민정신, 건강한 시민정신을 훼손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최재분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를 바꿔놓았는데 그 때 헝그리 정신을 강조했잖아요. 포만감에 편안해지면 정신적인 해이가 올 수 있습니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서 인디언들을 정복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무상으로 계속 주었는데 얼마쯤 가니까 그들이 스스로 무엇을 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인디언들을 편하고 포만감을 갖게 해주면서 한편으로는 무능화시켜버리는 정책이 결국 인디언을 주인자리에서 밀어낸 겁니다. 그래서 복지를 잘못 다루면 미래적으로 볼 때 재앙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학자들이 하는 것 같습니다.
박효종
우리가 국민 소득이 2만불 수준인데 나아갈 길이 있거든요. 우리가 결국 앞으로 선진 사회라고 얘기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새로운 자기 갱신이 필요한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무상급식 반값 등록금 등은 건강한 국민정신을 퇴화시키는 역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복지문제에서 특히, 포퓰리즘이 심한 것은 대개 정치인들이 가난을 이용해 표를 얻으려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반값등록금도 가난한 학생들을 노린 것이고요. 경제가 발전하면서 가난의 범주도 높아져서 옛날에는 기초생활보호자가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차상위 계층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면서 계속 차차차 상위계층이 생겨나고요. 정말 가난하기보다는 가난한 사람의 범주를 새롭게 규정하면서 가난을 자신의 자산으로 쓰려고 하는 것이 요즘 정치의 병폐라고 봅니다.
이종윤
미국도 길거리에 노숙자가 많지만, 우리나라도 노숙자가 매우 많습니다. 어른과 달리 자활능력이 없는 아이들이 급식문제는 정말 심각합니다. 지금 급식 못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요. 급식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 정책을 세워서 바르게 실천하면 참 좋은 일인데 너도 나도 다 똑같이 급식해 준다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똑같은 복지를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에게 하는 것과 부자에게 하는 것은 달라야 합니다. 평등이라는 게 없다고 했는데 차별 있는 것을 차별하게 취급하는 것이 평등이라고 생각을 해요. 반값 등록금도 결국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할텐데 아무나 똑같이 준다면 실업계 고등학교 아이들은 어떤 혜택을 받아야 하나요. 때문에 반값 등록금은 공의롭지도 못하고 정당성도 없는 완전히 포퓰리즘에 불과한 것이라고 봅니다.
최재분
근래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서구 현대정치철학의 정점에 있는 롤스의 <정의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봅니다. 롤스는 '최소 수혜자의 최대 행복'을 통해 자본주의의 가장 큰 단점인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에 접근했는데 다수가 행복한 사회보다 사회적 약자가 최대한 행복해지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주장했어요. 롤스는 불평등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개인의 능력만을 강조하는 국가는 자유주의 국가이지만, 둘 다 정의롭지 못한 국가이며 정의로운 국가는 차등이나 불평등이 공정한 절차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는 국가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이 인간의 능력은 평등할 수 없다는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통해 개인의 창의가 맘껏 발현될 수 있으면서 경쟁에서 쳐진 사회적 약자를 보듬어 안는 따뜻한 얼굴을 가진 자본주의, 자유주의가 공동체의 기반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의 운영은 국가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사회, 기업, 개인, 단체 등 사회구성원 모두가 참여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효종
복지는 정부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중세 때도 보면 교회가 시작했어요. 민간 차원에서 교회, 뜻이 있는 사람, 시민단체, 기업 등이 어려운 사람 돕는 이타주의를 실천할 수 있어요. 국가가 강제적인 세금을 통해서 복지를 극대화 하려는 것은 잘못된 패러다임입니다. 복지 포퓰리즘의 문제는 단지 재정의 문제를 넘어 국민정신을 얼마나 타락시킬 수 있는지 그런 것들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복지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국민정신을 건강하게 하며 사회활력을 유지발전 시켜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지를 내용적으로 보면 사람들에게 자립성을 키워주는 ‘생산적 복지’는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도 능력을 가지고 기여를 하는 적극적 의미가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매칭펀드 개념 비슷합니다. 국가가 50% 도와주면 50%는 자기의 힘으로 마련을 하는 겁니다.
가난 문제를 조사해 보면 물질적으로 가난하다는 수준만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가 있다고 나옵니다. 다시 말해 빈곤의 문제는 정신에서 비롯되고, 정신을 올바르게 하는 것이 복지의 급선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복지의 혜택은 지금은 패러다임이 아닙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보면 복지국가라고 해도 사각지대가 많아요. 정말 어려운 사람들,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이런 사람들한테는 그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 해도 복지시스템, 인프라가 적절히 구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지는 그냥 외형적으로 확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내실을 기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종윤
복지를 성경적 용어로 바꾸어 말하면 구제입니다. 구제는 옵션이 아니라 필수죠. 당연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구제를 하는 가장 좋은 예로 예수님이 비유로 드신 사마리아인의 선행이 있어요. 그 사마리아인이 돈이 더 들면 내가 와서 갚아 주리라고 말하는데 이는, 끝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제를 끝까지 하되, 물질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하는 복지정책에는 윤리가 없어요. 국가의 복지정책은 그런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국가는 이 사회가 이 일에 동참하도록 장려하고 구제하는 것을 도와주면 됩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책임은 있어요. 특히, 극빈자에 대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박 교수님이 좋은 말씀을 하셨는데 생산적 복지를 전 이렇게 해석했어요. 제가 기독교교도소를 만들 때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죄수들로 하여금 삶의 변화를 느끼게 하자 그러기위해 나보다 약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래서 공장을 세우되 그냥 돈 버는 공장이 아니라 장애인 공장을 만들자. 그럼 죄수들이 그들보다 내가 신체는 건강하지 않은가 생각할 것이고, 거기서 생산해서 수출하면 돈도 벌고 복지도 되고, 그게 바로 생산적 복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giving & keeping하고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반값등록금 얘기가 나왔는데 국민들만 희생하라고 하지 말고 그것을 결정하는 국회의원들이 먼저 솔선하라는 겁니다. 그럴 때에 국민들도 그것에 동감하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희생 없이 국민들에게 날 따르라고 하면 균형이 안 맞아 사회가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도 국민들에게 너무 과대한 사치욕구를 불러일으키지 말고 절제해야 해요. 모든 것이 그렇게 될 때에 가난한 사람도 박탈감을 안 느끼고 위로가 됩니다. 그렇지 않고 박탈감을 주고 ‘높은데서 사는 사람은 저런데’ 하는 생각이 들면 복지 국가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최재분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저 너머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북한동포를 바라봐야 하고, 또 세계적 차원에서의 인류애뿐만 아니라 이제 선진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몫도 있습니다. 정치권이나 민간사회만이 대중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세상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한국 교회와 우리나라의 선진국가의 비전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박효종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큽니다. 그럴수록 책임도 크고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정말 복음정신으로 돌아가서 포퓰리즘 말고 그냥 성경만으로 서야 합니다. 성경중심이라는 게 복음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입각해서 정도를 걸으면 됩니다. 물론 교회도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어느 정도로는 눈높이가 세속에 맞출 수밖에 없는 문제는 있겠지만 그래도 교회가 교회 나름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교회 계신 분들이 스스로 자기 개혁을 하고, 스스로 교회가 나름대로의 복음정신을 충실하게 하려는 모습이 참 신앙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교회가 외견상으로 크고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두기보다는 성경의 정신, 종교개혁의 그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으로 봤을 때, 한국 교회가 선교 받는 나라에서 선교 하는 나라로 섰는데 교회 내부 스스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되돌아 볼 때인 것 같습니다.
이종윤
돈을 많이 가졌다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선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을 도와주려고 하는 성숙한 백성이 있는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중국은 정직함이 없으니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결국 기독교 정신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는데 대한민국이 2만불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극빈자가 존재하고,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소외된 계층이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욥기서 31장에서 ‘네가 배고픈 자를 보고 먹을 것을 주지 않는 것은 죄’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25장에서 ‘도와주지 않는 것을 죄라고 악한 종’이라고 했지요. 그것을 국가만이 해야 하는가, 물론 국가가 최저의 것은 다 해야 하죠. 국가는 또 그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국민을 선동하고 방향 제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앞장서야 할 것이 교회이고요. 교회는 국민을 끌고나가면서 사랑을 주고 소외된 계층에 있는 사람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대학반값 등록금은 공정성이 없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학 등록금이 적정 수준인지에 대한 검토도 해야 하지만,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대학의 등록금 반을 도와주는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진행되는 복지 예산도 이대로 가면 15년을 못 간다고 합니다. 대책 없이 막 주고 하는 정책이 계속 나온다면 국가 장래에 큰 재앙을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이제 내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무분별하게 복지정책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데 우리 국민들이 당장의 유혹보다는 국가 장래를 생각하면서 현명하게 이를 적절히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재분
현재 진행되는 복지예산으로는 15년 가기도 어렵다고 하셨는데 복지가 국가의 성장 동력을 잠식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복지 포퓰리즘으로 인하여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한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우리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봅니다. 후손에게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복지를 내세우며 표를 얻으려는 정치권이나 국가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교회나 NGO, 기업 단체 등 사회구성원들이 스스로 자조하고 자력갱생하는 정신을 일으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약자를 돕는 것이 정의라고 하고 있으며, 또 그것이 복지의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차대한 이 시기에 한국 교회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땅에 세우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오늘 귀한 말씀을 주신 두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정리: 박봉수 主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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