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소개
서울교회 소개
서울교회의 철학
서울교회가 있기까지
주요활동
교회 오시는 길
교역자/장로
원로목사 소개
담임목사(안식중)
교역자 소개
장로 소개
선교사 소개
예배 안내
예배 및 집회시간 안내
교회 소식
교회행사/소식
모임/교인소식
순례자
언론에 비친 서울교회
주간기도
서울교회 사태
Home > 서울교회는 > 교회소식 > 언론에 비친 서울교회
2018-04-14
<순례자 274> 청교도 신학자요 경건한 목회자인 조나단 에드워즈 그는 왜 교회에서 축출 당했나? ①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 청교도 후예 가운데 대표적인 목회자요, 대각성 운동가요, 원주민 선교사요, 신학자며 철학자다. 1703년 10월에 미 동북부 지역 코네티컷주에서 아버지가 목사였고 어머니는 목사의 딸이였고 그의 아내 역시 목사의 딸로 경건한 청교도 가정에서 성장했다. 13세때 예일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라틴어, 헬라어, 히브리어를 자유롭게 읽을 정도로 뛰어난 지적 호기심과 열심히 학문에 정진했다. 17세때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바로 예일대 신학부에 진학하여 목회자 과정을 공부했다. 하나님의 예정론과 하나님의 주권사상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경건생활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1723년 졸업 후 예일대학에서 3년간 강의를 하다가 24세 때 장인이 시무하는 North Hampton교회의 부목사로 부임해 30세에 담임목사로 취임하여 대각성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

에드워즈 목사가 사역하는 동안 미국에 두 차례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먼저는 에드워즈 목사가 사역하던 노스 햄턴에 일어난 역사였고(1734-1735), 두 번째는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일어났다.(1740-1741) 두 번째 대각성운동은 조지 웟휠드를 초청하여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 같이 부흥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웟휠드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우정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패리 밀러는 뉴잉글랜드에 대해 말하기를 “조나단 에드워즈는 도화선에 불을 붙였고, 윗훨드는 폭발시켰다”라고 한다.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교인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도시마다 마을마다 교회의 성도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되었다.

에드워즈는 수많은 설교를 하면서 몸이 쇠약해졌다. “땅도 지옥도 그 어떤 것도 그 주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커다란 역사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친 부흥의 영향력은 어떤 현대 비평가도 설명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때 에드워즈가 부흥을 주도한 세 권의 책이 있는데 ‘성령의 사역의 표적들을 분별함’ ‘1740년 뉴잉글랜드의 신앙 부흥에 대한 소고’ ‘신앙의 열정’이라는 책을 남기게 되었다.

에드워즈 목사의 교회 축출

1750년 6월 23일 에드워즈는 그가 24년간 시무해 온 교회로부터 축출당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발단은 교회의 중직에 있는 재력가의 아이들이 외설적인 책을 읽었는데 이것을 에드워즈 목사께서 꾸중함으로 야기되었다. 교회 성도 간에 이 일로 쑤근거림이 계속되면서, 이 사실이 에드워즈 목사의 귀에 까지 들려왔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성만찬 문제가 있었다. 에드워즈가 성장할 때 청교도들의 2세의 신앙이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요나단은 장인이 시작한 Halfway Covenant(유아세례를 받았으나 입교하지 않은 아이들도 성찬에 참석해도 된다는 주장)를 반대하였다. 이 주장에 의하면 초신자들도 교회에 초청하여 성찬식에 참여케 한다. 그러나 믿음 없이 성찬식에 참석하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회심한 세례(입교한) 교인만 주의 만찬에 참여토록 가르치고 실행하였다. 이에 반발을 느낀 교인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목회자가 심방은 안하고 서재에 너무 많이 앉아 있고(하루 10시간 이상 공부함), 너무 잘산다 그리고 장로들의 자녀들을 책벌한다는 소문을 교회 안팎에 퍼트렸다.


이종윤 목사
<한국기독교학술원장ㆍ몽골울란바타르대 명예총장ㆍ서울교회 원로>

한국장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