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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3
기독교의 큰 공적, 구라선교(1) - 광주 나병원과 구라대행진

 천도교의 잡지 '개벽'은 1934년 11월 호에 “조선 삼대종교 공과론, 기독교회의 공과 과”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천도교는 기독교의 의료선교를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병원은 영리주의가 아니다. 수지가 맞지 않는다. 밑져가면서 사업정신으로 해가는 것이다. 전라도의 나병원은 정부로서도 아직 힘쓰지 못한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이 구료사업은 기독교의 큰 공적이다.

 이 글에서 기독교의 큰 공적으로 지목된 전라도의 한센병 환자(나환자 또는 문둥이) 구료사업은 여수 애양원을 의미한다. 애양원은 1909년 포사이드(Wylie H. Forsythe) 선교사가 행한 사랑의 실천에서 출발했다. 1904년 4월 2일 목포의 프렌치 병원에서 활동하고 있던 포사이드는 광주의 오웬(Clement C. Owen) 선교사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광주기독병원의 의료선교사인 윌슨(Robert M. Wilson)은 외과 전문의였고 이질과 폐렴으로 위중한 오웬의 치료를 위해서는 내과 전문의인 포사이드가 필요했다. 포사이드는 즉시 광주로 출발했지만 오웬은 이튿날인 4월 3일 하나님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오웬의 사망을 모르고 걸음을 서두르던 포사이드는 나주 남평을 지나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10년 넘게 한센병을 앓고 있는 여성이었다. 포사이드는 자신이 타고 있던 말에 여성을 태웠다. 훗날 광주의 성자로도 불린 최흥종 목사는 흉측한 몰골과 심한 냄새로 가까이 가기도 힘든 사람을 거리낌 없이 자신의 말에 태우고 광주로 들어오는 포사이드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당시 집사직으로 있으면서 제법 믿는다고 하던 나였는데 사랑이라는 진미(眞美)를 못 깨닫고 포 의사의 그와 같은 애적(愛的) 행동을 보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센병 환자가 병원에 다른 환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몹시 불편해했다. 여성을 병원에서 옮겨야만 했다. 윌슨은 우선 여성을 병원 인근의 오래된 벽돌가마로 옮겨 거처를 마련했다. 광주 나병원의 시작이었다. 광주에 나병원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한센병 환자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환자 수가 급증하자 미국남장로회 선교부는 인도?동양구라협회(Mission to Lepers in India and the East)의 지원을 받아 1911년 4월 광주 봉선리에 정식으로 나병원을 개설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나병원이 운영되었다. 미북장로회는 1904년부터 부산의 한센병 환자들을 보고 “한국 나환자 사업 타당성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 결과로 1909년부터 부산 일신기독병원 인근 언덕에서 한센병 환자에 대한 진료를 시작하여 이듬해 부산 나병원을 정식 개원했다. 대구에서는 1911년부터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가 한센병 환자를 돌보기 시작해 1917년 대구 나병원을 설립했다. 기독교의 나병원들은 대체로 환자들이 자치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병원 운영에 참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계를 위한 직업교육도 받을 수 있어 환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치료를 받고 상태가 호전되면 퇴원할 수 있었다.
 1910년대 중반부터는 조선총독부도 한센병 환자 격리시설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1916년 소록도에 만들어진 자혜의원이다. 그러나 기독교 병원과 달리 조선총독부는 환자들을 단순한 통제 대상으로 취급하여 엄격한 ‘절대적 격리주의’ 정책을 기반으로 퇴원을 금지할 뿐 아니라 ‘단종시술’을 통해 한센병 환자를 사회에서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는 한센병 환자의 수가 너무 많아 그나마 그런 시설조차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1928년 ‘조선나병근철책연구회’를 조직하고 꾸준히 구라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최흥종 목사는 총독부에 더 많은 나환자 집단수용시설과 치료시설이 필요하다고 건의했지만 묵살당했다. 몇 차례의 묵살을 경험한 최흥종 목사는 1933년 간호선교사 쉐핑(Elisabeth J. Shepping)과 함께 광주에서 조선총독부까지 행진을 시작했다. 훗날 ‘구라대행진’이라 불리게 되는 이 행진에는 출발 당시 150명의 한센병 환자들이 함께 했는데 조선총독부에 도착했을 때는 4-5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한센병 환자들의 무리가 총독부 건물로 진입하자 경비원들도 제지하지 못했다. 최흥종은 우가키 총독을 만나 소록도 시설의 대폭 확충, ‘단종시술’ 폐지, 치료 받은 환자들의 갱생 지원 등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 결과 1939년 소록도는 섬 전체가 한센병 환자들의 격리 및 치료를 위한 시설로 확충되었고 갱생원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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