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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6
백만의 영혼을 주님께! 백만인구령운동

 백만인구령운동은 1909년 9월부터 1911년 3월 사이에 진행된 한국교회의 대규모 전도운동이다. 선교사가 기획하고 한국인이 실행한 이 운동은 초교파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수는 20만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100만 명 전도는 1년 남짓한 사이에 5배 이상으로 성장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교세의 확장은 크게 보이지 않았고 감리회는 오히려 교세가 감소하는 기현상을 보였다. 이것이 더욱 기현상인 이유는 애초에 이 운동의 발상이 감리회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1908년부터 선교사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가장 큰 걱정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식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1909년 초 개성에서 활동하던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생활이 나태해지고 있음을 반성하며 기도회를 가졌다. 이들 중 스톡스(M. B. Stokes), 리드(W. T. Reid), 갬블(F. K. Gamble), 세 명은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계속 기도하기로 작정했고 모두 성령을 체험했다. 스톡스는 1년 사이에 5만의 영혼을 구원하라는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 한국인 신자들도 스톡스가 받은 사명에 동참하기로 했다.
 이런 계획은 그해 9월 열린 남감리회의 선교연회에서 확대되었다. 연회에서도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그 열기에 고무된 참석자들은 ‘올해 안에 20만 명을 구원’하기로 결의하면서 다른 선교회들도 함께 전도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기도는 바로 응답 받았다. 10월 재한 개신교복음주의선교회 연합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는 남감리회의 ‘전체 선교회의 공동표어를 채택하자’는 제안을 받아 ‘금년에 한국에서 100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One Million Souls for Christ in Korea This Year)를 표어로 정했다. 백만인구령운동의 출발이었다.
 운동의 촉진을 위해 미국의 세계적인 부흥사들이 속속 한국을 찾았다. 채프먼(J. W. Chapman), 알렉산더(C. M. Alexander)가 부흥회를 하고 돌아갔고 데이비스(G. T. B. Davis)는 한국에 남아 순회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전도의 열기가 삽시간에 퍼져나가면서 교파의 경계를 넘어 대규모의 전도단이 조직되었다. 전도단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복음서를 판매하였다. 수십만 권의 복음서와 수백만 장의 전도서가 전국에 배포되었다. 연합기도회, 매일기도회 등이 끊임없이 열렸고 성도들은 새로운 성령의 역사가 임해 교회 성장으로 이어지기를 기도했다.
 사람들의 헌신이 열기를 더 하면서 ‘날연보’(Day Offering)가 확산되었다. 날연보는 헌금을 하지 못하는 교인이 자신의 시간을 완전히 하나님께 바쳐 특정일을 전도하는 날로 약정하는 것이었다. 선례 없는 독특한 현상이었다. 전국적으로 연보로 바쳐진 날이 10만 일을 넘어섰을 정도로 한국의 신자들은 전도에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아낌없이 바쳤다. 한국인들의 열정과 헌신에 더해 뛰어난 카리스마를 가진 길선주, 김익두 같은 한국인 부흥사들이 부상하면서 선교사들이 독점하고 있던 리더십에 한국인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생겼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교세의 측면에서는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1911년에는 그래도 장로회의 성장, 성결교회와 침례교의 약진으로 전반적인 교세가 늘어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1912년에 급감하였다. 장로회와 감리회의 전체 교인 수를 보자면 1910년 178,192명에서, 1911년 181,296명으로 잠시 늘었다가 1912년 157,902명으로 급감하여 1909년 수준(157,663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이 운동이 실패했다고 보지 않았다. 물론 선교사들은 열과 성을 다한 한국인 신자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원하는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긴 호흡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말자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운동은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성공한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인 신자들이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려하였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조약으로 일제의 조선 병탄이 확실시되자 선교사들은 한국인 신자들이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게 되면 그들 스스로도 피해를 입고, 교회와 일제의 관계가 소원해질 것을 걱정하였다. 백만인구령운동의 또 다른 목적은 신자들에게 종교적 열정을 불어넣어 현실 세계의 모순에 지나치게 몰두하기보다 구령운동에 더 집중하게 하려는 것이었고 이는 확실하게 성공하였다. 덕분에 선교사와 일제는 한일강제병합 시기에 적대적 관계를 면하고 공존의 방안을 모색해 나갔다.
 백만인구령운동은 ‘인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겠다는 오만함으로 인해 실패한 운동’(보수적 신앙의 입장), ‘한국인들이 민족문제에 눈감게 만들기 위해 서양인이 기획한 운동’(민족주의적 입장)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운동은 한국인들의 신앙적 열정이 폭발한 전도운동으로서 한국인의 교회적 리더십이 출현한 계기이자 신자들의 공동체 의식과 헌신적인 신앙생활이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자리 잡는 결정적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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