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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0
기독교의 큰 공적, 구라선교(2) - 여수 애양원

 봉선리에 위치한 광주의 나병원은 도심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실제로 도심까지의 거리는 2km가 채 되지 않았다. 광주 나병원을 설립한 윌슨이 민가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한센병 환자들이 찾아오기 쉬운 곳에 병원을 위치시켰기 때문이었다. 또 환자를 개방적으로 수용하는 광주 나병원은 한센인이 매우 선호하는 병원이었다. 따라서 입원을 대기하는 환자들이 넘쳐나 양림리(현재의 양림동)를 중심으로 환자 마을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한센병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가지고 있던 광주 주민들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거기에 나병원과 환자 마을이 광주를 관통하는 광주천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 물의 오염을 우려하는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었다. 주민들은 끊임없이 나병원의 이전을 촉구했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민원을 받아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에 정식으로 병원 이전을 요청했다. 총독부는 병원이 이전하지 않는다면 병원 등록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수를 두었다. 결국 병원의 존속을 위해 이전이 결정되었다. 이전 장소는 여수 율촌면 신풍반도 일대였다.
 1926년부터 환자들의 대대적인 이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입원환자 681명은 그룹을 나누어 이동했다. 광주 나병원에서 이전 장소까지는 약 137km였다. 상당히 먼 거리지만 당연히 대중교통은 이용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낮에는 주민들의 돌팔매질을 당할 수 있어 산속에서 잠을 자고 밤에 이동했다. 환자들의 이동은 1928년에 가서야 완료되었다.
처음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기술인력이었다. 광주 나병원은 적어도 1919년부터 환자에 대한 목공과 석공 교육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26년 11월 목수 20명, 미장공 20명, 함석공 10명과 기타 기능공으로 이루어진 환자 110명을 애양원 건설을 위한 기술인력 선발대로 보낼 수 있었다. 1928년 윌슨의 보고서를 보면 석조 병사 33개, 본부 건물, 축사 1개, 곳간 2개, 우물 22개, 돌다리 16개, 도로 2.5마일이 환자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곧 병원과 교회를 세울 계획이었다.
 애양원에서 환자들의 공동체는 더욱 발전하였다. 언제 환자 자치조직이 생겼는지 연도는 알 수 없지만 1928년 환자 총회를 통해 이듬해의 위원회를 선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윌슨은 11개의 부서의 부장을 중심으로 환자들이 자치조직을 구성하도록 했다. 11개의 부서는 치안?가게?서무?재무?위생?교육?목축?농업?일용직 노동자?목수?석공이었다. 그리고 부서별로 2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해 집행위원회(다른 말로 부장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환자 자치조직이 성장하면서 교회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광주 나병원에서는 병원장, 교회, 환자 자치조직이 긴밀히 협력했다면 이제는 교회와 자치조직이 환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대립을 벌이게 된 것이다. 1929년 11월 애양원교회에 부임한 김응규 목사는 부장회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목사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다가 부장회와 직접적인 갈등을 일으켰다. 김응규 목사는 애양원교회의 첫 한국인 목사였는데 애양원 내부로 출입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소독하였고, 예배당 안에도 목회자 자리를 유리로 막아 환자들과 분리하였다.
 그는 치리권을 갖고 환자들을 통제하여 내부 규율을 세우려 했다. 이는 당장 보급품 분배 권한을 독점하면서 파벌을 형성하던 부장회의 불만을 야기했다. 결국 1934년에는 불만을 품은 일부 환자들이 교회에 불을 질러 교회가 전소되는 일이 있었고, 1938년 9월부터는 김응규 목사의 퇴진 운동이 벌어졌다. 퇴진 운동의 표면적인 이유는 김 목사가 신사참배를 했다는 것이었지만 사실은 오래된 갈등이 폭발한 것이었다. 결국 김응규 목사는 신사참배를 한 친일인사로 몰려 사임하였다. 윌슨은 새로운 담임목사로 신사참배에 결사반대했던 손양원 목사를 초빙했다.
 손양원 목사는 1935년에 부흥회 강사로 애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예배당 안에 환자와 목사의 공간이 유리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환자 구역으로 들어가 부흥회를 인도했었다. 이는 환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환자들은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에 부임하는 것을 반겼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훌륭한 신앙인이자 환자들을 격의없이 대하는 따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부임한 이후에도 손양원 목사는 환자들이 기거하는 방을 자주 출입하고 그들의 얼굴이나 손을 만지며 기도 및 상담을 했다. 손양원 목사와 환자들 사이에 강한 유대감이 생겨났다.
 손양원 목사 부임 이후 애양원교회는 질병 치유에 목적을 둔 ‘질병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중시하는 ‘신앙공동체’로 급속히 그 성격을 바꾸어갔다. 그 결과 1940년 9월 손양원 목사가 신사참배 반대 혐의로 기소되어 애양원교회를 떠나게 된 이후에도 많은 환자들이 신사참배 반대를 고수하며 신앙을 지켰다. 애양원에서 쫓겨나 치료를 받지 못해도,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도 환자들은 감옥에 있는 손양원 목사를 기억하며 절개를 꺾지 않았다. 부드러운 사랑이 만들어낸 굳은 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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