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일제 말 한 달이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기간이지만 한국기독교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이 있다. 이 기간 한반도에서 조선기독교, 대한예수교 등은 사라지고 오직 일본기독교만 남았다. 이 일시적인 공백에 이르는 길은 각 교파가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가결한 것에서 출발하였다.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한국의 여러 교파들은 앞다투어 ‘일본적 기독교’를 수립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장로교를 중심으로 이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면 1939년 11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의 ‘장로회 지도요강’부터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요강에는 ‘국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국체의 의미는 ‘일본 국가의 정체’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신도의 최고신인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가미라는 여신이 일본 천황가의 시조이며 이 천황가는 단 한 번도 혈통이 끊기지 않은 채 영원히 일본을 통치한다는 것을 일본의 국체로 삼았다.
‘장로회 지도요강’은 이 국체에 걸맞는 기독교를 만들기 위해 서구 의존적 사상을 버리고 일본적 기독교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하겠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는 단순히 설교의 내용이나 종교 예식에 일본 신도식을 도입하는 것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교단의 헌법, 교리, 의식, 기타 전반에 걸쳐 민족주의적 색채를 배재한 순수한 일본적 기독교가 되도록 하고, 성서와 찬송가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 관계 서적과 출판물도 국체에 맞지 않는 내용은 자구를 수정하기로 하였다.
먼저 찬송가와 성서가 ‘개정’되었다. 1942년 찬송가의 가사 삭제와 수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장로회 총회는 “신편찬송가 정정 사용 주지의 건”이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1943년에는 ‘수정판 찬송가’가 출판되었다. 이 새 찬송가의 앞부분에는 일본 국가, 일본 국경일 노래들, ‘황국신민서사’가 수록되었다. 성서도 수난을 받았다. 1943년 4월에 조직된 ‘조선기독교 혁신교단’이 성서에서 유대 민족주의와 관련된 부분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출애굽기와 다니엘서, 요한계시록이 삭제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신약의 사복음서를 제외한 모든 성서가 삭제되었다.
그리고 1943년 5월 한국 장로교의 헌법이 ‘개정’되었다. 교단의 이름부터 바뀌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이제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되었다. 한국 장로교의 명맥이 끊기는 순간이었다. 조선장로교단은 ‘실천요목’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는 말세, 심판, 재림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들도 일제의 입맛에 맞는 해석으로 고치고 일본적 신학을 수립할 것, 그리고 구약성서의 유대사상이 비기독교적이므로 이를 시정하기 위한 정당한 해석 교본을 편찬할 것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일본어를 사용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예배당을 새로 지을 때는 일본 양식을 고려하며, 예배와 집회는 일본 풍습을 채용하기로 하였다.
한국 장로교회가 일본교회에 흡수되는 이 과정이 매끄럽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43년 7월에 평북노회가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합법적으로 조직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기존 총회의 해소를 선언한 총회장 김응순을 탄핵하면서 기존 총회를 유지하겠다고 나섰다. 장로교회는 총회 유지를 지지하는 ‘호법파’와 새 교단의 성립을 지지하는 ‘교단파’로 나뉘어 분쟁을 벌이다 1944년 8월에 무조건 통합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평북노회 중심의 총회 유지 세력이 교회의 변질을 막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분쟁의 본질은 일제의 요청에 어떻게 부응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적 다툼과 주도권 경쟁일 뿐이었다. 분열되었던 약 1년간 양측은 일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종의 충성경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1943년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 탄생한 이후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의 어용단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다른 교파들도 대부분 비슷했다. 조선 감리회도 ‘일본기독교 조선감리교단’이 되어 있었다. 결국 한국 교회의 각 교파들은 1945년 7월 19일 완전히 통합되어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황민화정책이 완결되었음을 의미하는 일이었다. 이 조선교단의 성립에 대해 일본 메이지학원대학의 서정민 교수는 교회의 자율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관제성과 최초의 창립 제안에서 창립 총회까지 한 달도 걸리지 않았던 졸속을 그 특징으로 꼽았다. 애초에 설립 제안 자체가 총독부 정무총감이 한 것이며 최고 직위부터 세부 조직 구성까지 관권의 의사에 휘둘렸다. 그리고 성립 과정 어디에서도 교리, 제도의 차이, 교회 전통의 상이점을 극복하고 하나의 교회를 조직하는 과정의 고뇌나 타협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조선교단’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단이 창립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해방과 동시에 남북이 분단되자 남한 지역의 교회들은 ‘남부대회’로 모여 ‘조선교단’으로 인한 교파 합동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논의하였다. 이왕 하나로 합쳐졌으니 이대로 유지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결국 각자의 교파로 환원하였다. 이후 각 교파들은 내홍에 휩싸였다. 감리회는 어떻게든 다툼을 봉합하였지만 장로회는 점점 갈등이 커져 1950년대에 이르러 대규모의 분열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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