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아소동은 조선인의 무지에 기인한 두려움과 생활고에서 비롯된 불만이 가짜 뉴스와 만나 폭발한 것······영아소동은 한국 기독교가 만난 최초의 위기이자 새로운 선교 지역에서 거쳐야만 할 시험 무대이기도 했다

1888년 6월 10일 경 서울에서 흉흉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서양인들이 어린이를 유괴하여 잡아먹는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일본과 청나라 상인들이 어린이 인신매매에 관련되어 있었지만 조선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했고 몇 년 전부터 부쩍 늘어난 서양인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소문은 점점 다양한 이야기들로 번져갔다. ‘눈알을 빼 사진기의 렌즈를 만든다. 성찬식에 쓸 피를 뽑는다. 외국에 팔아넘긴다. 남자아이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다. 여자 아이들의 가슴을 절단해 우유를 만든다’ 등 끔찍한 소문이 줄지어 생겨났다. 이미 어린이의 잔혹하게 훼손된 시신이 몇차례 발견된 데다, 프랑스 공사관 에서 일하던 오봉엽이라는 사람이 외국인들이 아이들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소문은 점점 사실로 굳어졌다.
조선인들의 분노는 곧 폭동으로 이어졌다. 제중원, 배재학당, 이화 학당, 언더우드 고아원 등 선교사들의 학교와 병원이 그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 주요 장소로 지목되었다. 선교사들은 살해 위협을 받았고 선교사들을 돕고 있던 조선인들은 공격을 받았다. 이틀 사이에 10명의 조선인이 살해당하자 서양 각국 공사관들은 조선 정부에 항의하면서 이를 진정시키는 포고를 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포고는 ‘지금 조사 중이며 만약 의심스러운 사람을 보면 이들을 뒤 쫒아 거처를 당국에 신고해달라’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기에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켰다.
‘폭도들이 정동의 외국인 거주지를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팽배 해지자 미국이 먼저 제물포에 있던 해병대를 서울로 불러들였고 이튿날 프랑스와 러시아도 해병을 소환했다. 미군 해병대가 제물포에서 보도로 이동해 12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한 것을 보면 당시 서양의 공사관들이 이 일을 매우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의 군대가 서울에 진주하자 고종은 서양인들은 소문과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으며 소요에 가담한 자를 엄벌할 것이라는 포고령을 발표하였 다. 이후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해 6월 말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소요가 잦아들었다.
이 한달에 걸친 사태를 흔히 영아 소동(Baby Riot)이라 부른다. 이 일을 빚어낸 것은 조선인의 무지였다. 캔에 저장된 분유의 존재를 몰랐던 조선인은 젖소가 없는 나라에서 어떻게 서양인들이 매일 우유를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사진기 렌즈가 무엇인지, 성찬식에 사용되는 붉은 음료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그런 그들이 사진기에는 눈알이 달려 있고 성찬식의 붉은 음료는 피라는 소문에 혹하는 것도 완전한 무리는 아니었다.
당시 조선인의 불만이 누적된 것도 중요한 요소였다. 헤론 선교사 는 1889년 본국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인들이 서양인이 조선에 살게 된 이후 쌀값과 옷값이 올랐고 화폐 가치는 3분의 1에서 2분의 1로 떨어져 살기 힘들어졌다며 서양인을 미워한다’고 기술했다. 결국 영아소 동은 조선인의 무지에 기인한 두려움과 생활고에서 비롯된 불만이 가짜 뉴스와 만나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배후 없이 잘못된 정보가 순식간에 확대 재생산되지는 않는다. 현재까지 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이 배후는 크게 두 가지 설로 정리되고 있다. 하나는 서양의 문물과 사상이 유입되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의 수구세력이 이를 막고자 소문을 유포했다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청나라의 주차관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가 대 규모의 소요사태가 발생하면 조선 정부가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기에 이를 틈타 청나라의 군대를 서울에 진주할 계획으로 소문을 퍼트렸다는 설이다.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신하기 어렵지만 기존에는 전자의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후자의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영아소동은 한국 기독교가 만난 최초의 위기이자 새로운 선교 지역에서 거쳐야만 할 시험 무대이기도 했다. 스크랜턴은 1889년의 보고서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민중 시험기를 지났고 민중은 암암리에 우리를 믿기 시작했다’고 기뻐했다. 언더우드도 아마 무척 기뻤을 것이 다. 그는 영아소동 당시 여성 의료선교사인 릴리아스 호턴의 출퇴근길 호위를 자처했는데 이것이 사랑의 계기가 되어 후일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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